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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Aug 07. 2020

[픽션 오어 낫] 시즌2의 계절

1.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여행을 제안했다. 거의 10 만이니까 '오랜만'이란 표현은 너무 쿨한가? 우리는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남짓 방을 같이 쓰기도 했고 좌충우돌  때나 도약할  두터운 공감대로 세월을 쌓아왔다. 그러다가 내가 친구를 떠났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말하지 않았다. 교정되지 않을 거란 절망적인 확신 때문이었다. 친구는 전화 문자 SNS는 물론 주변을 동원해 안부를 넣었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무신경함과 뻔뻔함으로 무장한 적극성이 오히려 상처를 돋우었다.


늦은 , 코로나 때문에 사업을 접고 입국한 동아리 선배와 통화하다가 또한번 친구가 나를 보고싶어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번엔 연락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우리들의 스무살, 그때 그시절' 반사적으로 떠오른 까닭이다. 올들어 오랜 지인들의 얼굴이 러시안 룰렛처럼 랜덤으로 돌다가 철커덕 그리움의 과녁이 되곤 했다. 맞나, 다시 보는 ? 염려스러우면서도 반가운, 복잡한 마음으로 약속을 잡았다. 잠실 스타벅스 11시반. 보름 전에 만난 것처럼 십년만의 재회는 헐겁고 간단했다.


서너차례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익숙한 모든 것에  젖었다가도 마주한 현실이 갑자기 어색해져서 허겁지겁 추억의 시간으로부터 헤엄쳐나오곤 했다. 친구도 비슷했을 거다. 내가 상처를 감아안은 동안 그녀도  외면이 야속했겠지. 십년  일방적인 내 절연을 굳이 들출 필요는 없었고,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안전했다. 모호하게 평화로운 상태에 놓인 채로 '여행가자' 친구의 제안에 덜컥 예스, 해버렸다.  개의 일정을 바꿔야 했고 장마전선이 나를 졸졸 따라다녔지만 강행했다. 머뭇대다 가기 싫어질까봐.


2.

친구 지인이 운영하는 남쪽지방의 게스트하우스에 나는 3일, 미리 가 있던 친구는 5일 묵고 함께 올라왔다.

3.

수서행 SRT 나란히 앉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정차역 안내방송을 차곡차곡 흘려보내고 나니 어느덧 내릴 때가 돼서  잠이 깼다. 옆을 보니 친구는 두시간 내내 어있었던 듯 잠이 오지 않아 함께  경비를 계산했다며 뿌듯해했다. 칭찬을 바라는지 위로를 바라는지   없었다. 종착역에서 내려 전철역방향까지 친구와 함께 걸었다. 전철역 입구에서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다. 버스를 타려면 친구는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가야한다. 뭔가  말이 있는  같기도,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라고 해도 집중할  없었을 토네이도급 피로가 밀려왔다. 조심히 , 하고 돌아섰다.


가방을 비우고 샤워하고 커피를 내린 다음 소파에 몸을 었다. 몸이 해파리처럼 늘어졌다.  속의 진을  쏟아내버렸나. 여름이  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배낭에 훌쩍 올라타 따라온  아닐까. 이대로 여름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불행히도 여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나는     없을 만큼 지치고 무기력해져서 한숨과 함께 잠이 들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시계는  열한시 삼십오분. 몸에 한기가 돌아 에어컨을 끄고 다시 누웠다. 어둠 속에서 사위가 점점 눈에 들어왔다. 티비와 목제 캐비넷, 좌탁, 청소기, 공기청정기, 스탠드 램프에 눈길을  때마다 달아난 잠을 잡아오느라 눈을 길게 감았다. 침대로 갈지 이대로 달콤한 쪽잠을 이어갈지 갈등하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좌탁  핸드폰에서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울렸다.


'**님이 사진을 보냈습니다'

카톡, 카톡, 카카카톡, 카톡, 카톡, 카카카톡...

친구가 보낸 카톡에는  사진들여행지 사진 수십장이 낱장으로 도착해있었다.

'잠 깨운 거 아니지? 내 사진도 있음 보내줘'


나는 완전히 잠이 버려서 사진저장하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모든 텍스트가 읽힌 노란 창엔 공허한 물결만 일렁였고, 스트레스의 공격을 받은 나의 남루한 면역력은 밤새 팔뚝과 종아리를 간질였다. 맞아,  이런 아이였어. 무신경하고 예의가 없지. 나는 피부가 붉혀 따가워질 때까지 긁다가 알러지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4.

세월이 나에게 요구한 것은 이해도 체념도 아니었다. 닳아가는 것만이 세월을 이길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예민해지지 않는 .

5.

남쪽지방에 머무는 동안 종일 이곳저곳을 걷다가 저녁을 먹었다. 지인과 합석하기도 했고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차가 없으니 나른하면서도 바지런한 여정이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즐거움과 일탈의 기쁨은 물론이고 한적한 시골동네의 운치가 더해져 나로서는 '득템'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한 켠에는 이 여행이 감정의 파고없이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친구는 겉으론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었지만 심리적으론 증오와 우울 어디쯤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친구가 아무렇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얼결에 동승한 나의 여정도 담백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마지막 밤, 친구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뒤척이더니 휴대폰의 오디오북 앱을 켰다. 방안에 성우가 읽는 어린왕자가 나직하게 퍼졌다. 설핏 잠에서 깨면 이번엔 다른 책이 읽혀졌다. 잠을 깨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깬 잠을 도로 재우지는 못했다. 나는 일어나 오디오북을 끌까 하다가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새벽에 깼을 때 성우의 낭독은 끝나고 친구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들어 있었다.


저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오래 전에.


친구는 한 달 남짓 내 집에 머물렀다. 외국에서 돌아와 다시 외국으로 나가야 할 시점의 한 달 공백을 내 집에서 채우게 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고 나올 때까지 친구는 저렇게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 집에 있다는 온기가 좋았다.   


나는 출장이 잦았다. 출장가느라 집을 비운 날, 내 방에서 내 지인과 밤을 보내고도 친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침대 맡에서 친구의 팔찌가 나왔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방바닥에서 자느라 허리아파서 네 방에서 잤다는 말, 믿었다. 울 엄마 오시면 깔아드리려고 장만한 목화솜인데 불편했니? 그럼 내 침대에서 같이 자자 했었다. 지인의 고백으로 한 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얼굴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침대 좀 나눠 쓴 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그리고 내가 걔랑 잔 게 아까우면 진작 잡지 그랬어.


그리고는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방문을 발칵 열었을 때 친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었다. 이 아이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다다르면 신경을 탁 끊듯 이불로 장막을 쳤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쌕쌕 숨을 고르며 잠이 들었다.


좋아하면 함께 할 수 있고, 오랜 관계는 무조건 아름답다고 믿고, 불리한 정황은 하얗게 지워버리거나 까맣게 잊어버린다. 친구는 여전히 그렇게 산다. 수십장 전송의 카톡 테러를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잠들 수 있는 무신경함에 내 모서리가 닳아질 수 있을까. 이해와 포용이 아니라 닳아지는 현명함을 위해 세월의 힘을 믿어볼까.


뭐 하나 변한 것 없는 채로 맞은 시즌2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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