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언니야.
오늘처럼 비가 길게 오면 술 생각들 나지? 이런 날 속지 말아야 할 게 취중진담이니 술김에 어쩌구 하는 낭만적인 변명들이야. ‘취중진담’이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지만 취중에는 진심이고 나발이고, 이해하고 말고가 없어. 그냥 술에 절여진 거지.
내가 알았던 어떤 이는 술만 마시면 실수인 척 동성인 친구를 추행했어. 만지고 부비고 급기야 술에 취해 자는 친구의 속옷에 손을 넣더라. 죽이 잘 맞는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목적이 달랐던 내 경험담이야. 불쾌하게 반복되는 스킨십에 관계를 끊었지만 스토킹이 이어졌고 급기야 내가 학대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나중엔 목소리만 들어도 오싹하더라. 덕분에 수십 년 된 절친과도 한 침대에 눕지 못하는 트라우마가 생겼다만.
백인백색의 취중만행 가운데 가장 흔한 게 헤어진 여(남)친 찾아가 무너진 자존감 세우기야. 직장상사에게 깨져서 기분이 십원짜리만도 못하거나 뉴페이스와의 썸 또는 연애가 난항일 때 주로 저지르는 짓이지. 회사는 종로3가고 집은 노량진인데 무심코 우리 집 앞까지 와버렸다던 전남친도 있었어. 우리 집 잠실이었거든. 김유신도 아니고 말이지. 그는 그날따라 되게 급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날따라 너무 이성적이었던 나머지 기분만 더러워졌지. 그 분 석 달 후엔가 결혼했지 아마.
재수 없으면 덜컥 걸려 넘어지는 게 ‘취중’의 올가미고, 실수에서 트라우마까지의 거리는 한 끗이야.
오빠들, 술 마시고 다정하지 마. 용기내지도 마.
언니들, 술 마시고 눈 풀지 마. 다리도 안 돼.
/안은영
https://www.news1.kr/articles/?4005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