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스X101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던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등장한 피라미드는 일종의 상징성을 담고 있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는 반드시 올라야 하는 곳이었다. 권력과 명예의 최상단, 절대다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 스카이캐슬에서 살던 수한은 피라미드의 중간에서 사는 것을 꿈꿨다. '보통의 삶'이 행복하다고, 인생에선 피라미드의 중간이 좋다고 했다.
수한이 아닌 배우 이유진으로 돌아온 소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필요한 곳도 있다"며 '프로듀스101X(엑스)'에 자발적(?) 출사표를 던졌다. "희망사항은 1등"이라고 말했다.
케이블 채널 엠넷(Mnet) '프로듀스 101'이 돌아왔다. 101명의 연습생은 어김없이 피라미드 앞에 서서 저마다 한 번씩 꼭대기를 바라보며 염원했다.
2016년 시작한 '프로듀스101'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프로그램이었다. 활동기한이 정해진 '시한부' 걸그룹 아이오아이를 뽑기 위해 적나라한 경쟁 사회의 단면을 보여줬다. 프로그램은 계속됐다. 2017년엔 워너원, 2018년엔 아이즈원을 뽑았다.
2019년, 이번엔 'X'라는 단서가 붙었다. 'X'는 최하위 등급이다. X등급을 받으면 트레이닝 센터에 입소하지 못한다는 룰을 적용했다.
새로운 규칙을 적용했다지만, 프로그램은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같은 패턴 안에선 같은 종류의 불편함과 논란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거대한 피라미드는 위압감을 준다. 101명의 연습생들은 순서대로 피라미드를 향했다. 신고식 현장에서 소년들은 재빠르게 다른 연습생들을 '스캔'한 뒤 자신과 비교한다.
스튜디오 안의 대형 모니터에 소속사의 이름이 뜨면 연습생들의 얼굴은 흥미롭게 변했다. 그들은 스스로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언제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대형 기획사를 가장 마지막에 입장시킨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구성이었다. 세상 밖은 시끄러워도 '엔터 왕국' 안에서는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는 YG. 화면으로 YG의 두 글자가 뜨자, 한 연습생은 "유난히 글씨가 커보인다"고 말했다. "대형 기획사 연습생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 같다"는 연습생도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 제일 꼭대기로 올라간 JYP 윤서빈 연습생은 방송 이후 '일진 논란'과는 무관하게 대형 기획사를 등에 업은 당당한 마지막 연습생으로 비쳤다. 윤서빈은 결국 소속사와는 연습생 계약이 해지됐고, 프로그램에서도 하차했다.
연습생이라고 다 같은 연습생이 아니었다. 연예기획사에는 등급이 있다. 내신과 수능 점수에 따라갈 수 있는 대학이 다르듯, 그래서 교실 안에선 '스카이'(SKY,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바라보는 것이 '학생의 덕목'인 것처럼 여겨지듯 엔터테인먼트의 세계에서도 순위가 있다. 대형 기획사가 있고, 간판스타 하나씩 거느린 중소 기획사도 있다. 이름 없는 연예기획사나 한 물 간 연예기획사의 연습생들은 위축돼있거나, 소속사를 살려보겠다며 의지를 다지기도 한다. 개인 연습생들은 앞서 간 '프로듀스101'의 생존자를 그들의 희망으로 받들었다.
연습생들은 애초에 출발선이 다름을 인정했다. 출발선의 차이가 능력의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기회가 아무리 균등하게 주어진다 해도 출발선이 다름으로 인해 기회를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연습생들의 의지는 아니었다. '프로듀스X101'이라는 세계에서 만든 '차별'이다. 대형 기획사의 이름 앞에서 내심 위축되다가도, 호기롭게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연습생도 있었다. 그와는 별개로 프로그램은 꾸준히 주입하고 있다. "너희들은 출발선이 다르다"고, "그걸 인정하라"고. 하지만 연예기획사의 규모와 위세가 연습생들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연습생들에겐 외모도 능력이고 권력이다. 젤리피쉬의 김민규 연습생이 등장하자 피라미드에 자리를 잡은 연습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연습생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자꾸만 눈이 간다"는 감탄은 기본이다. 자신의 외모 점검도 시작됐다. 괜히 한 번 립밤을 발라보는 연습생도 있었다. 처절한 자아비판도 시작된다. "여기서 내가 제일 못 생겼다"는 말속엔 "그렇지 않아. 너도 잘 생겼어"라는 답변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몇 년을 앞서 태어난 '형'은 어린 동생을 완곡하게 타일렀다. "그런 말은 못써." 상처 입은 자존감을 빠르게 회복하는 일은 이 세계에선 중요하다. '예쁜 애 옆에 예쁜 애'는 이들의 세계에선 흔한 일이다. '뛰어난 외모'의 경쟁자들이 옆자리에 넘쳐난다. 끊임없는 비교와 그로 인한 자기 비하가 어떤 선택과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프로듀스X101'은 여전히 노골적이다. 프로그램은 봉건시대의 신분 사회와 경쟁 사회를 동일시하는 이상한 구성을 보여준다.
신분사회에서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 거주하는 계급은 '착취의 대상'이었다. 권력을 가진 계급은 이들을 그들만의 왕국에서 배제했고, 의사 결정권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대상'으로 존재했다. 그것이 성적 자유와 인권을 침해한다 해도 거스를 수 없었다. 무시, 멸시가 팽배했으며, 무소불위 권력이 생존의 위협이 될지라도 그것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 사회적 배경, 신분, 계급 탓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혹은 견뎠다. 그러다 사람들은 '자기 탓'을 하게 됐다. 백정의 자식이 백정이 되는 것은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 태어난 탓이라고, 혹은 나의 '잘못'이라고. 신분제와 계급론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프로그램에선 모든 것이 계급이다. 유명 아이돌 그룹을 배출한 숫자가 많고, 규모가 큰 연예기획사에 소속된 것도, 눈에 띄게 외모가 뛰어난 것도 계급이다.
능력도 계급으로 비친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능력'은 매력적인 요소다. 연습생들에게 능력은 노래와 춤 실력이다. 노래와 춤 실력이 뛰어나면 그들에게 주어진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능력 지상주의'는 이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가치다. 능력이 뛰어나고,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연습생에겐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의 가치를 우선하는 것은 꽤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을 정당하고 불가피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능력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빚어지는 모든 차별은 개인의 '탓'이 되어버린다. 경쟁에서 도태된 것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 부족의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잔혹한' 상황들도 생긴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집요하게 개인을 몰아붙인 결과는 이미 봐왔다. 수저 계급론, N포 세대, 헬조선.
'프로듀스X101'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조금 더 자극적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깨워준다.
이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10대 시절부터 겪어왔던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내가 밟힌다고 교육받으며 입시 정글에서 발버둥 치고, 찰나 같은 한 시절을 지나 일등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닌다. 스펙을 쌓고, 외국어를 연마하고, 필요하다면 성형도 한다. 그렇게 출발선에 서자, 누군가는 이미 저 앞에서 페라리를 타고 출발 신호를 기다린다. 앞에 선 것도 반칙인데, 심지어 빠르다. 나이키 맥스 밖에 없던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거리는 이미 너무도 벌어졌다. 그것은 어느 시점에선가 '능력의 차이'와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의 '경제적 불평등'은 새로운 계급사회의 단면이다.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물론 프로그램에서 계급을 가르던 기준은 '결정적 요인'이 되지 않는다. 사회가 요구하는 학창 시절의 성적과 학벌, 배경 등이 노력과 능력의 결과로만 치환되지는 않는다. 이들에겐 절박함과 가능성이라는 '미지'의 판단 요건들이 있다. 방송은 드라마를 필요로 하고, 시청자는 그곳에서라도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구문'이 되어버린 '개천에서 난 용'이 만들어지는 스토리를 바란다.
그럼에도 프로그램은 새로운 계급 사회이자 신분 사회를 형상화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다. 이 안에서 성과 이외에 부각되는 것은 많지 않다. 단지 그것을 포장하는 것은 '꿈'이다. 수년의 연습생 생활에도 아이돌 가수로는 데뷔하지 못하고, 배우로 전향했다 '못 다 이룬 꿈'을 향해 도전한 박선호에겐 심사위원 두 사람의 애틋한 스토리까지 더해졌다. 태권도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할 만큼 유망주로 인정받고, 어쩌면 올림픽에서 태극전사로 볼 수도 있었던 연습생 김요한은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프로그램에 도전했다. '프로듀스X101'은 이 출연자들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기회'와 '자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그릇된 세계관을 보여준다. 사람의 가치를 성적과 외모로 평가하고, 경쟁의 세계에서 이긴 승자가 독식하는 것을 당연하게 바라보게 한다. 저성과자는 무가치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고성과자 혹은 승자는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상정한다.
프로그램은 이제 시작인데, 순위는 실시간으로 정해졌다. 연습생들은 자신을 다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외모로 주목받은 연습생은 1등 자리에 올랐고, 대형 기획사를 등에 업고 출격했다 프로그램을 나가게 된 연습생은 단번에 12위로 안착했다. 피라미드가 완성된 뒤 이들은 어떤 미래를 살아갈지 궁금하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 '국민들'의 여전한 사랑을 받을 때, 경쟁에서 살아남아 '꼭대기'에 유지할 때, 그 자리를 누릴 때, 이들은 TV 밖에서 어떤 세상을 살아갈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