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운 Jan 10. 2018

180110

# 처음 시험을 보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26살이었고,
그렇게 모든 시험'준비'를 끝내놓고는 두 달 만에 호주로 떠났다.
사람을 다뤄야 하는 직업인데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자신도 없었다.
내 어쭙잖은 잣대로 남들을 함부로 재단하게 될까 무서웠고,
대단치도 않은 경험들로 자만하게 될까 무서웠다.

부르주아 부모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살아야 하는 내가
온전하게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해 살아갈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떠났고, 다행히도 60만 원 들고 도착한 호주에서 6개월간,
11개월간 세계를 떠돌면서 살아남았다.  
6개월간 일주일에 91시간씩 일하며
부모로 대표되는 경제적 울타리를 벗어나서 살 수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했다.
온전히 모든 것이 내가 스스로 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한 달에 단 하루만 쉬며 대기업 신입에 가까운 연봉을 6개월만에 벌었다.

밑바닥 노동자로 살면서
함부로 인간에 대해 안다고 여겼던 날들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말하는 도덕성과 상식이 경제력이라는 기반 위에 있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밑바닥 외노자의 삶이 다행히 기간이 짧아  기존의 내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왜 살아가면서 돈 역시 중요한 가치인지를 깨달았다.
돈이 나의 인격과 지위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은 나의 인격과 가능성을 유지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걸 여러번 느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돈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법과 도덕성과 상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법을 배웠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노력해야하는지도 배워왔다.
내가 행복하면서 도덕성과 상식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됐다.
여행에서의 선택들이,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지 않더라도 내 가치관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경험으로 쌓였다.

그렇게 돌아와 맘잡고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2년 동안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 되었지만,
그 시간 속에서 초심을 잡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여행에서 얻은 나에 대한 확신과 경험에 대한 믿음, 긍정적으로 스트레스를 풀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자신 때문이었다.

감정적으로 체력적으로 달릴 때면

카메라를 들고 싸돌아다녔고,
생각이 굳어지지 않게 독서토론모임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일상에 지칠 때, 종종 만나는 여행에서의 인연들이 잊고 살던 여행추억과 그때의 내 모습을 상기해줬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나씩 해방구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
적어도 내가 이 막막한 레이스를 중간에 포기하지 않도록 잡아주었고,
여행에서 끄적인 글들은
앞이 흐려질 때마다 나침반이 되어주었고, 힘들 때마다 돌아올 베이스캠프가 되어주었다.

또다시 일 년을, 아니 기약 없는 기간을 준비해야 한다.
올해도 작년과 같을 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엔 너무 캄캄하다.
캄캄하지만 꾸역꾸역 버티며 돈을 벌고 경력을 쌓아가는 동기들을 보면
내심 한편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난 잘할 거 같다. 그럴 자신도 있고 행복할 자신도 있다.
그 기회가 올 때까지 잘 버텨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17120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