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정신과 의사 둘(형제다)이 출연하는 '양브로의 정신세계'라는 채널이다. 둘이서 심리 관련 주제에 대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나는 특정 채널의 영상을 여러 개씩 잘 안 보는데, 이 채널의 영상은 30~40개 정도 봤다. 나는 텐션이 높은 사람을 보기만 해도 기가 빨려서 텐션 높은 유튜버의 영상은 많이 못 본다. 그런데 이 채널은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듯한 인트로부터 묘하게 힘아리 없는 텐션까지 나랑 잘 맞는다.
특히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던 날이면, 이 채널의 영상을 자동재생해놓고 라디오처럼 들으며 퇴근한다. 왜 유독 힘든 날에 이 채널을 찾을까 생각해 봤다. 회사에서는 내 정신이나 감정이 가장 우선순위가 낮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 원만히 유지해야 하는 관계, 지켜야 할 마감 등이 우선순위가 더 높다. 그런데 이 채널에서는 내 정신과 감정을 가장 우선순위 높게 다뤄준다. 내 정신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이걸 해야 하고, 저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채널을 보면, 마음을 근육으로 친다면, 고강도 노동 후 마사지 받는 기분이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이 둘이 하는 얘기에는 '근거 있는 따뜻함'이 있다. 덮어두고 '괜찮아, 잘될 거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정신과적으로 봤을 때 이러한 이유로 네 잘못이 아니고,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T 맞춤형 위로랄까.
이 채널의 영상 중에 카푸어(car poor)에 대한 영상이 기억에 남는다. 카푸어는 엄청나게 비싼 차를 사는데, 60개월 할부를 해도 여력이 안 돼 버는 돈의 100%, 120%를 할부금으로 내고, 이 돈을 충당하기 위해 또 카드 빚을 내는 사람들이다. 이런 식으로 차를 사면 차가 내 전부, 나 자체가 된다. '나 람보르기니 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한다. 람보르기니가 없으면 피카츄 없는 지우처럼 힘을 잃는다. 차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다른 소비도 그렇다. 내 월급을 넘어서는 명품을 사면 명품을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모시고 다니게 된다.
양브로는 카푸어 얘기를 하면서 옛날에 떴던 기사 하나를 소개해주었다. 할머니 한 분이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고급 외제차를 긁었는데, 차주가 나와 좁은 곳에 주차를 해 죄송하다며 할머니에게 사과를 하고 보내드렸다는 기사다. 추측하기로 그 차주는 그 차를 사는 데에 본인 자산의 100% 가까이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차의 흠집을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를 그냥 보내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차가 60개월 할부로 사서 겨우겨우 할부금을 갚고 있던 차라면 흠집이 난 걸 본 순간 돌아버렸을 것이다. 왜냐면 그 차는 나의 전부니까. 남의 상황을 봐줄 여유가 없을 것이다. 무언가에 내 일부만을 할애한 사람과 내 전부를 쏟은 사람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젊음을 바쳐 이루고자 한 꿈이 좌절되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기도 한다. 내 모든 걸 쏟아 사랑한 상대가 이별을 통보하면 헤어지느니 죽겠다는 마음이 든다. 자식이 내 뜻대로 살지 않으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널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라며 분노한다. 이 모든 상황의 공통점은 내 전부를 바쳤다는 점이다. 전부를 바쳐 뭔가를 하는 것이 낭만적이고 숭고하게 그려지곤 하는데, 실제로는 아주 위험한 일 아닐까. '난 이거밖에 없어', '난 이거 아니면 안 돼'라고 생각하게 하고, 탈출구 없는 구덩이에 매몰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것에도 전부를 바치면 안 되는 게 아닐까. 내가 그것의 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나의 주인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