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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 O May 21. 2022

당해봐야 아는 사람


중학생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좌석에 앉아있었다. 내 앞 좌석의 머리 시트의 뒷면에는(내 시야가 닿는 면) 투명하고 두꺼운 시트 안에 광고 종이가 납작하게 붙어있었다. 광고 지면에 크게 적힌 문구가 시야를 끌었다.


"현명한 사람은 들어 알고, 똑똑한 사람은 보아 알며, 어리석은 사람은 당해 봐야 안다"


점집 광고였다. 성인이 된 지금과는 달리, 오만 원을 쥐고 어렵지 않게 점집에 갈 처지가 못되었다. 나는 그 광고가 말하는 '들어서 아는 현명한 사람'은 당연히 아니었으며 보기만 해서 알만큼 똑똑하지도 않았다. 삶의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던 중학생은 당연히 당해 봐야 아는 어리석은 부류에 속했다. 나를 놀리는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을 묘하게 받은 건 내가 중학생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나여서였을까.


그땐 눈치채지 못했다. 묘하게 불쾌함을 느꼈던 그 순간, 그것이 나에게 슬그머니 따라붙었음을..

그냥 유머스러운 광고라 생각했다. 까맣게 몰랐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지금의 내가 그 오래된 광고를 기억해내게 될 줄은. 신기하게도 묘하게 기분 나쁜 그 느낌이 세월이 무색하게 조금도 늙지 않고 나타날 줄은.



때는 지난여름이었고 방의 창문은 컸다. 아침이면 쏟아지는 해가 기어코 잠을 깨우고야 마는 날들이었다. 직장인이었을 때는 밝은 햇살에서 근거 없는 희망을 느끼곤 했다. 자유의 몸이 된 지난여름, 하루의 시작을 절망감으로 시작하게 하는 것 또한 바로 그 햇살이었다. 아침의 해는 옆집, 윗집, 윗집의 윗집, 또 그 옆집. 즉,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러, 돈을 벌러 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너만 빼고 다들 할 일이 있고 갈 곳이 있어'라는 메시지로 느껴졌다. 그래서 아침은 무서웠으며 무거웠다. 방 안의 텅 빈 공기가 버거웠다. 공기가 무겁게 짓누른다는 느낌을 처음 알았다. 무한의 공간이 무서움인 것도, 자유가 공포인 것도.


자유를 만끽하기보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지내던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았다. 퇴사 후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수입이 0이 되었다는, 나이 삼십 중반을 향해 가는 미혼의 여자가 '무직자'라는, 지금껏 조직에서 해온 일을 써먹을 데가 없다는 자각을 하는 따위의 것들. 이 삶은 아니라고 울부짖으면서도 회사를 견디며 다녔던 건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기력한 백수'가 되는 끔찍한 장면만은 펼쳐지지 않길 기도했기 때문이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정확히 그 장면의 정중앙에 내가 있었다.


사회적 생산활동은 멈추었더라도 신체적 생산활동은 멈춰지지 않았기에 두려움과 절망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밥을 챙겨 먹었고 나오는 쓰레기를 갖다 버렸다. 아침에는 해가 무서워 덜덜대다가 밤이면 여전히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배겟잇을 적셔댔다. 내일 아침이면 또 무서운 해가 찾아올 걸 알면서 눈을 감았다. 출근과 퇴근의 징글징글한 쳇바퀴를 겨우 벗어났건만 이 무슨 지독한 윤회인지. 계획이 무산되고 함께할 동료가 없다는 현실을 수시로 직면했다. 혼자서 뭘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다는 생각을 수 백번 하는 동안 이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는 예감이 디폴트 값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지겹도록 반복되는 것은 혼자서 점심을 차려먹는 일과 환한 햇살 아래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일이었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은 두려움으로 점철된 어느 날 쓰레기를 버리고 오던 길에 그게 생각났다. '어리석은 사람은 당해봐야 안다'라는 광고 문구 말이다. 7년 동안 지겹도록 '퇴사! 자유!'를 외칠 때마다, 내게 동조해주길 바라며 동료들의 눈빛을 애써 구걸할 때마다 누누이 내게 현명함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주던 친절한 사람들. "회사 좋아서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 먹고살려고 다니는 거지" "회사가 전쟁터면 바깥은 지옥이야" "그래도 이렇게 일하고 이만한 연봉 주는데 없어" "하고 싶은 일하며 사는 사람이 어딨냐" "나가봐야 정신 차리지" "불안정한 자유보다 안정된 복종이 좋아"


현명했다면 그들의 친절한 조언만으로 내 인생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똑똑했다면 선례를 경험한 사람들을 찾아보고 미리 조치를 취했을 텐데. 어리석게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당해버렸다. 20년도 더 전에 만난 그 묘한 불쾌감에, 그 따위 점집 광고 문구에 져버린 것 같아서 기본 베이스 막막함에 패배감까지 추가됐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백수가 되는 것은 엄청난 공포와 함께 텅 빈 시간을 가져온다. 말 그대로 텅- 빈 시간. '텅 빈'이라는 표현을 쓴 건,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물들지 않은, (즉) 어떤 시간의 전후에서 오는 잡음이 섞이지 않은, 그러므로 제한되지 않은, 일요일 저녁이 되어도 오염되지 않는 '깨끗한' 시간이라는 의미다. 스트레스와 걱정에 취약한 타입이라 대부분의 시간을 오염된 생각으로 채웠던 때와는 다르게, 텅 빈 시간을 채우도록 허락된 것은 오직 스스로 묻는 질문과 대답이었다. 


인류가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공포와 두려움 덕이라고 했던가.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감정이었지만 이미 찾아온 감정들은 어쩔 수 없이 나를 지푸라기라도 잡게 했다.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오늘 울더라도 내일 아침이 무섭더라도 날이 밝으면 뭣 같은 무력감과 패배감을 질질 끌고 지역 도서관을, 청년지원센터를 찾아다녔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았느냐 하면 못 잡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버둥거림은 언젠가 반드시 무언가를 가지고 온다는 것을. '언젠가'가 언제인지,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걸 찾아내는 데는 버둥거림이 가장 느리지만 가장 빠른 방법인 것을. 


공포, 불안, 두려움, 막막함 그리고 버둥거림. 이것들이 흐르는 시간을 배경음악 삼아 왈츠를 추다 보니 이런저런 기회가 오기도 했다. '일단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유혹의 손길이 뻗쳐 오기도 했다(이전의 고통 가득한 세계로 다시 빨려 들어갈 뻔했다). 불안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마다 이전의 실수를 되풀이할 뻔했다. 그럴 때 나를 붙들어 준 것은 텅 빈 시간 동안 했던 오염되지 않은 생각들이었다. 내가 왜 퇴사를 했으며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은 어디까지인지, 무엇이 과욕이고 견디지 않기로 선택한 것은 뭔지, 그래서 이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등.


나는 그대로지만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지점을 지난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몸 담고 있는 환경이 지독히 싫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중에 혹시 대책 없이 탈출해 본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버둥거림을 좋아할 리 없겠지만, 기꺼이 스스로의 인생에 잠시 버둥거릴 기회를 준다면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게 될 거라고. 그건 한 번뿐인 당신의 삶에 예의일 수도 있다고.  



들어서 아는 것, 보아서 아는 것을 '내가 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얼마나 허약한지 상대방은 귀신같이 안다. 스스로도 알게 된다는 것이 더욱 비참하지만(..) 2030 세대를 주 타깃으로 하는 쇼핑몰 브랜드가 70대의 윤여정 배우를 광고 모델로 쓰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제작된다. 그녀의 수상소감이, 예능에서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에게, 젊고 어린 세대들에게 꽂히는 것은 그녀가 살아온 삶이 그 말에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말에 실리는 힘. 그건 '당하는' 사람들, 끝내 어리석게 겪어내고야 마는 사람들에게 인생이 주는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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