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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Sep 08. 202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졸렬함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권고 사직을 받은 직장인의 황당함

주먹구구 연구소의 소장 박졸렬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인사 최고총괄자라 들먹였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말서를 써야 할 것이라고 직원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 전 홍차에게 시말서를 강요한 후 재미가 붙은 모양이었다. 사실 주먹구구 연구소에는 진짜 인사총괄자인 정준한 팀장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박졸렬만큼이나 비열하기 짝이 없고 남에게 일을 미루는 것을 좋아했기에 박졸렬이 대신 인사권을 휘두르는 걸 내심 고마워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박졸렬은 협소한 이 연구소에서만큼은 '인사 최고총괄자'이기도 하고 '연구사업 최고결정자'이기도하며 '세계 일류 주먹구구 연구소의 위대한 지도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직함이 늘어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홍차는 그저 그의 점점 길어지는 직책을 보며 도대체 어떤 결핍이 그를 길이에 집착하게 했는 가 궁금해할 뿐이었다.


박졸렬은 직함이 많은 만큼 화도 많았다.


그날은 회의 중 동료 직원과 눈이 마주쳐 웃는 그녀가 자신을 음해하려던 것이 틀림없다며 시말서를 요구해왔다.


지금 누가 웃음소리를 내었어?


"유자차씨, 소장이 앞에서 말을 하는데... 피식피식 웃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저, 홍차... 아니,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근데 맹세코 소장님과 전혀 상관이 없..."

"아니!! 소장을 음해하려고, 어! 그렇게 밖에 생각이 안된다고, 어? 지금 유자차씨는 소장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시말서 써와!"


주먹구구 연구소를 다닌 이후 억울함은 홍차에게 더 이상 낯선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웬만한 일에는 억울함을 억누를 수 있었다. 며칠 전 분명 대리석의 컨펌을 받은 보고서를 보고 박졸렬이 노발대발하자 대리석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문서'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에도, 이부조가 은근슬쩍 자신의 일을 그녀에게 미룰 때에도, 정준한이 자기 부서원도 아닌 그녀 자리까지 찾아와 굳이 점심을 사 오라고 시킬 때에도...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빈 종이를 어떻게든 채워나가야 하자 내장 깊숙이 접어두었던 억울함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내면의 위험하고 어두운 감정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마음에도 없는 반성의 말을 써 내려가다 보니, 억울함의 크기만큼이나 글씨가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 보니 순식간에 빈 종이를 채울 수 있었다.


개소리를 잘 지어내는 자신의 뜻밖의 능력에 감탄하며 홍차는 조금 우쭐해졌다. 물론 방금 공개적으로 상사의 고함을 들으며 시말서를 쓰게 된 사람으로서 느낄 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먹구구 연구소에서는 실낱같은 기쁨과 비겁한 행복이라도 놓치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 때문에 홍차는 이 우쭐한 감정을 조금 더 붙들고 있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박졸렬은 홍차의 시말서를 10초 정도 들여다보더니 심술 난 어린아이처럼 책상에 시말서를 탁 내려놓았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직원 인사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인터넷 쇼핑이나 하던 인사팀장 정준한까지 대동하고 있었다. 어딘가 불길했다.


"글씨체가 마음에 안 들어."

"네?"

"글씨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이렇게 밖에 못써? 반성한다는 사람이 글씨를 이렇게 밖에 못쓰냐고. 글씨는 또 왜 이렇게 크고 삐뚤거려? 글씨를 이렇게 밖에 못쓴 것에 대해서 시말서 한 장 더 써와"

"????????"


홍차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준한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설마 너는 제정신이겠지'라는 마음이었다. 항상 그렇지만, 홍차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정준한이 입가의 침 거품을 닦은 엄지와 검지를 책상에 문지르며 말했다.


"작성하시고 제 책상 위에 올려 두세요"


홍차는 자신의 몸속 심장과 폐, 위장 등 모든 장기가 다 녹아버리고 그 빈 공간을 뜨겁게 끓고 있는 울분과 화가 대신 차지하게 됨을 느꼈다. 박졸렬과 정준한을 개새끼라고 부르는 건 진짜 개(새끼)에게 송구스러운 일이었다. 그거야말로 개에게 시말서를 써서 제출해야 할 감이라고 홍차는 생각했다.


"... 당혹스러움에 심경을 추스르지 못하여 시말서를 작성하는 도중 손이 많이 떨리게 된 점 사죄드립니다..."


써내려 나간 문장을 나직이 읽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장이 발화된 순간을 기점으로 한국어 역사의 전과 후가 나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분노와 울분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홍차의 마음과는 달리 창문 밖 도시는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이따금 멀리서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만 도시의 백색 소음을 방해할 뿐이었다.


홍차는 두 번째로 작성한 시말서를 들고 정준한을 찾아갔다. 정준한은 그가 응원하는 야구팀 굿즈를 쇼핑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오든 말든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뻔뻔히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홍차와 그녀의 시말서를 발견한 정준한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홍차씨, 오늘 쓴 두 장까지 합하면 시말서가 벌써 세 장이네요"

"그러게요."

"시말서 세 장이면 권고사직인 거... 알지?"


새로운 정보에 홍차는 갑자기 정신이 맑아졌다.


"네?"

"아니 뭐~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구... 소장님이랑 얘기 좀 해봐야겠는 걸?"


정준한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끝없는 소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홍차는 떨리는 마음으로 재빨리 자리로 돌아와 주위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말서 3장'과 '권고사직'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역시 정준한의 얄팍한 상식을 믿어서는 안 되었다. 시말서 3장이 권고사직을 뜻한다는 것은 어떤 법적인 근거가 없는 정보였으며, 권고사직이래 봤자 그 '권고'를 거절하면 직원을 자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렇지만 홍차의 상대는 주먹구구 연구소이기 때문에 그녀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홍차는 언제 어디서 야생동물에게 물어 뜯길지 모르는, 깊은 밤 숲 속에 홀로 남겨진 아이처럼 두려웠다.


하지만 홍차 또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주먹구구 연구소에 출근한 이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박졸렬의 변덕과 더러운 인성에 질려 일을 그만둔 사람은 벌써 다섯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녀는 생존자(survivor)인 셈이다. 생존자의 강인함은 앞으로 그녀를 지켜줄 것이 분명했다.


양양이를 건드리면 배때지에 빵빵이를 갈기겠다는 외국 짤.jpg


홍차는 오랜만에 항상 마시던 향기로운 꽃 차가 아닌 뜨겁고 까만 커피를 마시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때 정준한이 그녀를 찾으며 박졸렬이 그녀와 Zoom 미팅을 하고 싶어 한다고 알렸다. 사무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홍차는 정준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으로 회의실로 향했다.


홍차는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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