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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Jan 18. 2022

고양이와
프랑스 SF영화를 보지 마세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게 된 이들의 운명에 대하여

우리 집 고양이 토토는 충청북도 출신이다. 산골 마을의 날씨가 점점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워지던 2019년 겨울 어느 날, 우린 토토를 구조했다. 긴 자동차 여행 끝에 토토는 도시의 아파트에 도착했고 그때부터 인간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토토는 처음엔 ‘얌얌’과 쿠션을 거부했지만 결국 안락함에 항복하고 말았다.

다른 종과의 동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우린 고양이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오래된 프랑스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플래닛 [La Planète Sauvage] (1973)을 같이 시청했다. 



영화는 외계 행성을 배경으로 트라그(Traag)라는 외계인이 인간과 공생하고 갈등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은 옴(Om)이라 불리는데, 아마 프랑스어 단어 homme (인간)의 말장난으로 생각된다. 애니메이션 속 트라그와 옴의 알레고리는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인종차별이나 동물 권리 등 여러 주제를 연상시켰고, 토토는 너무 뻔한 우리의 영화 선택에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


... 그녀를 만족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하지만 이게 바로 고양이의 매력 아닐까.


트라그는 오랫동안 옴을 길들여 왔는데, 티와(Tiwa)라는 외계인 소녀가 고아가 된 옴, 테흐(Terre)에게 지식을 전달하며 상황은 급변한다. 티와는 블루투스 헤드폰과 닮은 교육 기기를 테흐와 공유하기 시작한다.



티와의 교육 기기를 통해 외계 행성과 트라그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얻고 글을 읽고 쓰게 된 테흐는 어느 날 티와에게서 도망친다. 그 뒤 테흐는 공원에 사는 야생 옴 무리에 합류하게 되고,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카리스마로 결국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 사이 트라그 지도부는 옴들을 트라그의 복지에 위협이라 간주하여 이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운다. 티와의 교육 기기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테흐는 야생 옴들을 몰살 계획에서 구한다. 이후 야생 옴들은 트라그로부터 독립을 꿈꾸며 우주선을 짓고 판타스틱 플래닛 (혹은 프랑스어 원제인 la planète sauvage, 야만의 행성)으로 떠난다.



여기서부터 안 그래도 이미 이상했던 영화가 본격적으로 맛이 가기 시작하는데, 괜히 프랑스에서 만든 SF영화를 함부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라던가..


왓...


옴들이 발견한 판타스틱 플래닛은 트라그 번식과 생존에 중요한 행성이었다. 테흐의 지휘 하에 옴들은 트라그의 번식 수단(…)을 모두 부숴버린다. 결국 두 종(種)은 공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옴들은 트라그의 행성을 떠나 테흐(Terre, 프랑스어로 지구)라는 이름의 행성에 정착하게 된다. 


애니메이션은 티와를 닮은 어린 트라그가 또 다른 외계 생명체를 애완동물로 삼은 채 교육 기기를 통해 옴과 트라그 사이 갈등에 관한 역사 수업을 들으며 끝이 난다. 


해피 엔딩인 것일까


영화를 본 난 혼란스러웠다. 트라그와 옴 중 누구의 입장에 이입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해방되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영화는 토토가 도망을 계획할 것이며 길고양이 무리의 대장이 되어 고양이 행성으로 떠날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은 존속살해(patricide)에 대한 인류의 좀 더 보편적이고 신화적인 두려움을 자극한다: 우리는 결국 우리를 파멸시키고 배신할 존재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있는 걸까? 


과연 이게 인류를 위협할 존재의 얼굴인가?!!


사랑하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존재와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나는 토토가 매번 욕실 규조토 매트에 몸을 비비며 이옹이옹 거리는 이유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토토는 내가 왜 8시간 (혹은 그 이상!) 씩이나 잠을 자며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토토가 그저 귀여운 솜뭉치가 아니며 나는 더더욱이 완벽한 보호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인간의 성공적인 동거를 위해 우린 서로 안에 있는 복잡함과 불가해함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니까 인간 안의 고양이와 고양이 안의 인간을 찾아내고 받아들이라는 거다. 


토토는 가끔 꼭 사람처럼 한숨을 쉬곤 한다. 그녀의 머릿속 인간적 고뇌의 결과물이라 믿는다. 


마찬가지로 난 가끔 토토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방구석을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다행히 수년간의 교육과 문명화, 인내 덕분에 정말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방 안을 뛰어다니진 않지만, 중요한 건 내 안에 동물적 충동이 있다는 거다. 우리가 서로 다르면서 같다는 것은 고양이와 인간의 화합 가능성을 보여준다. 


누가 봐도 토토는 나와 함께 있는 걸 매우 즐거워하며 우리의 우정에 감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면의 고양이와 요상한 프랑스 SF 영화를 보면 안 된다는 값진 교훈과 더불어 나와 토토는 각자 소중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얻었다. 서로 안의 불가해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 속의 모순과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토토는 자기 성찰 중인가 자기도취 중인가?


토토가 누군가에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응석을 부리거나, 몇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빵 끈을 쫓고, 담요 위 깊은 잠에 빠져 다리를 씰룩거릴 때 그런 그녀에게서 난 내 모습을 본다. 나 또한 다른 이의 관심을 갈구하고, 하찮은 것에 목숨을 걸며, 때론 나 자신도 모르는 것을 꿈꾸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토토 또한 날 통해 마음속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을 지닌 채 인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울지 모르겠다.


 

토토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널 많이 사랑해.


물론 토토가 길고양이들과 함께 우주선을 짓고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여 고양이 독립을 이루진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토토와 같이 산다는 것은 그녀의 현실 도피적이며 파괴적인 꿈과도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내가 매일 나도 모르는 나의 불가해한 부분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2020년 영문으로 작성했던 블로그 글을 번역/수정한 글입니다.

원문 링크: https://medium.com/@yewonhong1226/la-plan%C3%A8te-sauvage-de-toto-watching-fantastic-planet-with-my-cat-47675ccfce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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