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 찻잔 Feb 04. 2022

"이런 십-자수!"

과연 실과 바늘이 포스트-퇴사 인간에게 평화를 주는 가

다소 파란만장했던 퇴사 과정은 알게 모르게 내게 수 백개의 잔상처를 남겼고, 이는 대부분 분노로 표출되었다. 내 분노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직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에서 내 소중한 시간을 버렸다는 것과 수개월 동안 상식이 없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노출되어 누적된 피로에서 나오는 분노였다.


분노는 너무나도 쉽게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내면의 불안과 심란함은 잘못 설계된 하수구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와도 같았다. 하수구 냄새는 날파리나 벌레 같은 다른 불쾌한 것들을 끌어들이는데, 나의 불안함 역시 여러 가지 강박적인 행동을 끌어들였다. 재미있는 건 당시 난 이런 행동들을 강박적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이를 통해 내 불안함을 해소하고자 했다는 거다.


.... 효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여러 시도 중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단연 십자수였다. 바느질, 뜨개질과 더불어 십자수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워낙 손이 굼뜨고 주의 지속 시간이 짧은 난 중학교 가정 시간 이후로 바늘과 실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나에게 세 행위의 공통점은 한 땀 한 땀 서서히 행위자의 정신을 좀 먹는다는 것 정도였다.


우리 집 고양이가 내 불안과 혼란의 냄새를 맡고 있다.


안그래도 평소 존재론적 위기로 심란했던 내 마음은 퇴사 후 더 강렬한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날 보며 수십 년을 바느질과 자수에 할애한 친할머니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거라며 십자수를 권유하셨다. 확실히 졸렬했던 전 상사의 태도를 곱씹으며 폭행죄의 벌금을 알아보는 것보다는 훨씬 생산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반복적인 일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은 물론 (덤으로!) 귀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엄청난 실수였다. 친할머니의 경직된 광대뼈와 칭찬에 인색한 입꼬리만 봐도 그녀가 자수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기보다는 지나간 세월에 대한 분노와 후회, 그리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향한 심술을 담아 손주들에게 모자, 목도리, 그리고 인형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모자와 목도리로 몸을 감싸고, 인형을 안고 잠이 들어 꿈을 꾸곤 했던 나에게 세상을 향한 불만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십자수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나 또한 할머니처럼 내면의 평화는 얻지 못했다. 대신 역사 속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방 한 구석에서 억압적인 가부장 사회와 숨 막히는 가족체계를 향한 분노와 좌절감을 한 땀 한 땀 인내해냈을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1848년 이디스-앤과 2022년 나 사이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많은 문화권에서 바느질과 자수 실력이 여성의 가정성과 결혼 가능성을 당락 지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실과 바늘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족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얽기 설긴 천에 바늘을 찔렀다 빼내는 과정에서 행위자의 머리는 서서히 비워지고 생각이 마비된다. 복잡한 생각은 거의 불가능한데, 떠오르는 생각은 기껏해야 '이런 개 같은 바늘에 또 찔렸네' 정도다. 어떻게 하면 폭력적인 가장에게서 도망칠 것인지,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할 수 있는지는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이걸 천 번 찔렀다면 뭔들 못 찌를까?' - 영미 웹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십자수 밈(meme)


그렇지만 바느질과 뜨개질, 자수에는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마법적인 힘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심술이었든 사랑의 마음이었든 - 어쨌거나 아이를 키운다는 건 사랑과 심술의 적절한 균형이니까 - 할머니의 노동의 결과물은 우리를 꽤 성공적으로 추위에서 보호했고, 할머니가 만들어낸 인형들은 내 상상력 속 주민이 되었다. 그녀의 피조물은 내 애착 인형과 더불어 내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무시하지 못할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매듭짓고, 땋고, 엮는 과정에서 우린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힘을 합치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배운다. 높은 첨탑에 갇힌 이가 커튼과 침대보를 엮어 인질범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고, 괴롭힘을 당하던 약자가 실을 엮어 깡패의 목에 휘감을(!) 밧줄을 만들 수도 있다. 실과 바늘은 족쇄이자 동시에 족쇄를 깨부수는 망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십자수는 자기 파괴적인 동시에 창조적인 복잡한 경험이다.


손가락을 여러 차례 찔리고, 프렌치 매듭을 향해 소리 지르는 것을 참기 위해 쉼 호흡을 하고, 심지어 어느 날 밤 침대에서 바늘을 잃어버려 왼쪽 엉덩짝에 구멍이 한 번 뚫리고서야 나는 겨우 손바닥만 한 십자수 작품을 하나 완성할 수 있었다. 식탁보나 피아노 덮개, 심지어 옷에 수를 놓기 위해선 얼마나 강렬한 투지가 필요한 지, 그런 투지가 생기기까지 행위자가 얼마나 많은 인내와 금욕의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프렌치토스트, 프렌치프라이, 프렌치 바닐라 라테는 날 미소 짓게 하지만, 프렌치 매듭은 내 인내심을 시험한다...


십자수를 통해 실과 바늘로 내면평화를 얻기엔 내게 손재주가 너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있었다. 아마 가까운 미래에 협박당하지 않는 이상 다시는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경험으로 책상 앞에 붙일만한 귀여운 소품을 만든 것만은 아니었다. 십자수와 바느질, 뜨개질은 무언가를 완성해 나가는데  순간의 요행이 아니라     지어가는 매일의 노력, 성실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쏟아지는 서사와 정보, 선과 악, 혹은 '우리'와 '타인'이라는 (전)근대적 이분법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손가락이 바늘에 찔릴 때마다 "이런 십자수!"라고 소리 지르고 잠시 분을 삭인 후 계속 하루하루를 수놓아가는 것뿐이다.


"이런 십-자수!"

매거진의 이전글 고양이와 프랑스 SF영화를 보지 마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