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 찻잔 Mar 26. 2022

스피노자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 감응(affect)케 하겠다!

현대인은 감정에 압도되어 살아간다. 허영심과 무기력함, 행복, 사랑, 정의감... 그리고 이를 느끼기 위해, 혹은 느끼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불)필요한 것을 소비한다.


나 또한 요즘 활자와 육식, 필라테스 레깅스, 밈(meme), 동물의 숲을 끊임없이, 그리고 강박적으로 소비하고 있는데, 내게 다가온 분노라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서인 듯하다.


내가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련의 엿 같은 사건들이 수개월 동안 내 인내심을 서서히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잘못된) 인간들과 잘못된 만남으로 빚어진 일로, 상황을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합법적인 범위 내에선 많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난 이해를 하려고도, 그 불가해함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음에 그저 분노했다.


분노란 무엇일까. 어쩌면 너무 큰 질문일 수 있겠다.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내가 느낀 이 특정한 감정은 무엇일까? 무엇에, 어떻게 감응을 받아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일까?


내 감정을 들여다보며 스피노자의 감응(affect)과 감정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 스피노자 동상은 어떤 감응을 방출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감응은 간단히 말해 내가 외부의 무언가에 감응을 받고, 반대로 내가 외부로 감응을 주는 것 모두를 말한다. 감응은 항상 쌍방향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렇기 때문에 감응은 물질과 정신 사이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힘이 있다.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는 인간의 피부를 인터페이스라 말하며 감응과 감정을 구분한다. 감응에 사회적으로 용인된 이름표를 붙인 것이 감정인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감응은 감정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자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감응과 감정을 나누는 것이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시엔 응아이(Sianne Ngai)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새롭고 어딘가 사소한 감정들(짜증, 불안 등)을 예를 들며 감응과 감정의 구분을 강도의 차이에서 찾는다.


내가 느낀 분노는 단 하나의 강렬한 사건이 아니라 바틀비(Bartleby)적 순간들이 쌓여 완성된 감정이었으므로, 응아이의 해석이 조금 더 적절할 듯하다.


소리 지르고, 울고, 내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상대방을 조롱하고 자극하며 분노를 물리적으로 표출하는 과정에서 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부정적 감정의 분출이 감정의 단계를 넘어 감응의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 예상치 못한 틈새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감응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감응을 주도록 나 자신을 열어내는 것과 같다.


감정은 흔히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 반면, 감응 앞에선 이러한 잣대가 무의미해진다. 외부에서 받은 감응의 좋고 그름을 나누는 순간 감응이 아니게 된다. 특정한 문화와 사회, 역사, 개인의 배경에 기반한 판단과 의미부여를 통해 이미 감정으로 인식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감응을 통해 본다면 7대 죄악 중 하나인 분노는 더 이상 부정적이고 피해야 할 악한 감정이 아니다. 분노의 분출은 주변에 일어나는 엿같은 상황을 잠시 중단하고 방해하며, 상황의 재해석을 요구하는 변화의 매개가 될 가능성의 순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분노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 가가 아니라, 내게 다가온 이 특정한 진동과 주파수를 지닌 감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가이다.


Uh oh...


감정과 감응이 가진 힘을 생각하기 위해 탱크와 핵미사일의 전쟁이 아니라 사랑이나 우정, 정의감으로 세상의 악을 무찌르는 히로인들을 선망하던 어린 시절로 잠깐 돌아가 보자. 세일러문이나 웨딩피치는 마법 (변신) 소녀 장르 내 비슷한 애니메이션과 게임의 문법을 일찍이 제시했다.


이 장르 속 주인공들은 당장 좋은 기분과 올바른 느낌 사이에서 갈등한다. 난 이를 feel good과 feel right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소녀들은 옳은 감정은 자기 발전과 이타적 행동에서, 옳지 못한 감정은 이기적 행동과 분노, 복수심에서 온다고 주장하며 필 굿과 필 라잇의 이분법을 따라 여러 갈림길에서 나아갈 방향을 선택하며 행복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필 라잇의 감정은 결국 사회문화적 기준을 따르는 것으로 언제든지 옳지 않은 감정이 될 수 있다. 필 굿의 감정 또한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부흥에 따라 이기적이라서 나쁘다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득이 되고 직관적이기 때문에 좋은 감정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또, 악을 무찌른다는 것은 결코 악을 완벽하게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악당에게 감응받고, 나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감정의 틀에서 벗어나 감응의 세상으로 들어서면 우린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혹은 통제할 힘이 전혀 없다는 좌절감을 포기하는 동시에, 나와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얻는다. 내가 감응을 받은 만큼 나 또한 상대에게 이해 불가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동을 남기며 상황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마법 소녀들이 스피노자를 읽고 감응의 힘과 가능성을 알았더라면, '사랑과 정의(감)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가 아니라, '감응의 이름으로 널 변화시키고, 나 자신 또한 변화하겠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쉴 새 없이 감응받고 감응하며, 오늘도 난 나로 인해 진동하고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진동하고 변화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여봐요 소로의 숲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