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 사실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며, 삶을 그저 흘러가는 일상의 연속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우리 모두가 결국 '죽음 대기자'라는 것이다.
삶의 끝자락에 서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 표현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면, 젊은 시절의 그녀는 누구보다 활기차고 강인한 분이셨다. 대농가의 안주인으로 집안 살림을 책임졌고, 여덟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그 모든 의무를 묵묵히 감당해 내셨다.
어머니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시골집과 농사일을 정리하고 도시로 올라오신 후에도 멈추지 않으셨다. 손자와 손녀를 돌보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고, 마을 이웃들과도 밝고 활발하게 교류하며 시간을 보내셨다. 그런 그녀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계기는 다소 특별했다. 집안 제사 문제로 고민하던 중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도 된다”는 말을 들으신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교적을 정리하고 성당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돌아가시기 30년 전부터 성당을 다니셨지만, 나는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기에 신앙이 얼마나 깊었는지 다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남긴 유품 속에서 그 믿음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어머니는 여러 교리서를 정독하고, 기도서를 필사하며, 대모였던 이연숙 베로니카 씨와 친밀하게 교류하셨다. 그분은 어머니가 미사를 보지 못했을 때는 "주의 기도를 33번 한다"는 식으로 메모를 보냈고 어머니는 그 메모도 잘 간직하고 계셨다. 이 모든 흔적들은 어머니의 신앙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었다.
어머니의 오래된 성경가방 아래서 발견한 수십 장의 신자카드와 기부증서는 나를 놀라게 했다. 자식들로부터 받는 적은 용돈으로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장애자기관에 기부를 했고 적지 않은 헌금을 하시기도 하셨다.
하느님의 은총이었을까. 어머니는 병상에 누워 계셨던 마지막 1년 동안에도 큰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신 기억이 없다. 트로트를 좋아하시던 어머니를 위해 병상에서도 트로트를 자주 들려드렸지만, 성가를 들으실 때 오히려 평온한 표정을 지으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가까이에서 함께 생활하면서도 어머니의 내면의 소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떠올라 미안함이 밀려오곤 한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렵고 불안하며 겁이 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염두에 두는 것은 삶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인생을 온전히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어머니의 생애를 돌아보며, 걸음 하나하나가 단순히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귀하고 값진 순간들이었음을 새삼 느낀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어머니의 시간을 기리기 위해서다. 어머니가 걸어온 인생, 그 모든 순간들이 단순히 사라지는 기억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빛나는 흔적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는 모두 ‘죽음 대기자’ 일지 모르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삶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어머니처럼 말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그 소중한 기억들을 마음에 간직한다. ‘죽음 대기자’로서의 삶은 두렵고 외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가진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삶의 끝자락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는 믿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