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방은 참 정갈하다. 햇볕이 들어와 머물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숨을 고르듯 고요하다. 아파트 베란다 창밖에는 아직 남은 낙엽 몇 장이 겨울바람에 몸을 비트는 중이다.
어머니의 침대 머리맡에는 우리가 선물한 사진집이 놓여 있다. 얇은 페이지를 넘길 힘조차 잃어버린 어머니는 그러나 누군가 그것을 펼쳐 보여줄 때마다 얼굴에 작은 웃음을 띠곤 하셨다. 사진 속에는 젊고 강인했던 어머니가 있고, 손을 꼭 잡고 웃는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다. 그 시간은 마치 찬란한 노을빛처럼 우리 가족의 추억을 한껏 물들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을 때면 문득 느낀다. 그 가벼운 무게와 거칠어진 주름, 작은 떨림은 생의 끝자락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품으려는 노력이었다고.
머리맡에는 자개 화장대가 놓여 있다. 소박한 얼굴손질 도구들과 결코 비싸지 않은 화장품들이다. 윗눈썹이 얕은 어머니가 가장 챙기는 것은 눈썹 붓이다. 어느 날 붓이 없어 성냥 꼬치를 태워 그리는 것을 보기도 했다. ‘눈썹 붓을 좀 좋은 것으로 사드릴 걸’ 하는 후회를 한다.
그 옆으로는 묵직한 장롱이 자리 잡고 있다. 장롱 속은 어머니의 오랜 시간이 담겨있다. 한쪽엔 봄, 여름, 가을, 겨울용 이불들이 가지런하게 쌓여있고 다른 한 칸엔 옷들이 걸려있다. 오랜 세월 장성한 자녀들이 사다 드린 옷들이 꽤 많다. 그 아래 서랍 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무슨 잡다한 문서들 외에 다른 서랍에 어머니의 수의가 들어있다. “저 요란한 마포 옷을 입고 먼 길을 떠난단 말이지” 한번 본 뒤로 두 번 다시 그 서랍을 열진 못한다.
벽에는 오봉일월도의 판화가 걸려 있다. 다섯 봉우리와 해와 달이 선명히 그려진 이 그림은 왕의 방을 지켰던 궁궐의 상징물이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긴 세월을 축복하는 효심의 표상으로 여기에 있다. 그 붉은 해와 푸른 달빛은 방 안을 조용히 수놓으며, 마치 어머니의 길을 비추는 듯하다.
다른 한쪽 벽에 어머니의 사진틀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첫 번째 사진 속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단아한 한복을 입고 서 있다. 넷째 딸의 간호학교 졸업식에서 찍힌 사진으로, 두 여인의 얼굴엔 빛바랜 세월의 품위가 배어 있다. 하얀 고름과 곱게 잡힌 치마 주름 속에는 서로를 응원하는 눈빛이 담겨 있다.
또 다른 사진 속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서 있다. 젊은 날의 그들은 집 마당에서 촬영했다. 아버지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어머니는 그 옆에서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바람결에 머리칼이 날아가며, 마치 "우리는 함께 이곳에서 오래 살아갈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어머니의 미소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고, 방 안에 따스한 온기를 더한다.
안방, 이 공간은 어머니의 지나온 시간을 말없이 품고 있다. 그 안에 서면 마음이 잔잔한 물결처럼 흔들리며, 어머니의 삶과 그 안에 깃든 사랑을 느끼게 된다.
며느리가 정성껏 마련해 드린 자개농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꿈과 희망이 새겨진 창문과도 같다.
농의 표면에는 자개로 그려진 무릉도원이 반짝인다. 가늘게 빛나는 자개의 조각들은 높은 산봉우리를 이루고, 산 아래로는 물이 졸졸 흘러내려 계곡을 만든다. 마을에는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져 있고, 집 앞에서는 아이들이 웃으며 뛰놀고 있다. 그림 속 세상은 마치 오래된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 따스하고 정겹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새들이 한가로이 날고 있다. 어떤 새는 둥지를 찾아가고, 어떤 새는 자유롭게 비행한다. 그 곁에서 자개의 빛이 반사될 때마다, 이 무릉도원의 풍경은 마치 생기를 얻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자개농은 요즘 당근마켓에서도 안 팔리는, 그냥 줘도 가져갈 사람이 없는 애물단지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한때 모든 엄마들이 바라던 희망이 담겨 있다. 높은 산과 물 흐르는 계곡,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새들... 이 풍경은 어머니들이 사랑한 삶의 모습이자,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기도 하다. 꿈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라지만, 이 자개농에는 어머니의 작은 소망과 그 시절의 로망이 또렷이 남아 있다. 나는 이 어머니의 자개농이 한없이 좋다.
또 하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재봉틀. 전엔 무쇠다리가 있는 의자까지 달린 것이었으나 다리를 없애버리고 흔히 앉은뱅이라고 하는 낮은 재봉틀이다.
그 재봉틀 앞에 앉은 어머니는 얼마나 당당했던가. 명절을 앞둔 장날이면 어머니는 장에서 갖가지 천을 사다가 여덟 자녀들을 위해 골고루 옷을 해 입히셨다. 어느 땐 알록달록 한복이었다가 어느 땐 학교가며 입을 수 있는 수수한 양복이나 아버지 셔츠, 바지까지도..
낡은 재봉틀은 한 세기의 시간을 담고도 여전히 묵묵히 서 있다. 어머니가 떠난 뒤로 재봉틀 앞에 아무도 앉지 않았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손길을 기억하는 듯하다. 검은 몸체 위에 희미하게 남은 손때, 이곳저곳이 닳아 반질반질해진 모습, 그 모든 것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만 같다.
재봉틀은 단지 도구가 아니라 어머니의 삶 그 자체였다. 당당하게 앉아 발판을 밟던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거장의 예술작업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강하고 자랑스러워 보이셨다.
재봉틀은 이제 더 이상 옷을 만들지 않지만, 여전히 이야기를 짓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어머니의 젊음과 가족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고,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머니의 품 안에 있는 듯한 아련한 안식을 느낀다.
앞 창문을 열면 바로 베란다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평생을 가꾸어 오신 환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손끝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어머니의 손길과 마음을 담고 있다. 농사일로 다져진 정성과 사랑이 그대로 꽃 가꾸기로 이어져, 어머니의 삶은 그곳에 고스란히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여전히 피어나고 있는 꽃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이상하게 두 갈래로 갈린다. 환하게 피어난 꽃 속에서 어머니의 정령이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아 기쁘다가도, 이제는 손수 꽃을 돌보지 못하시는 어머니의 빈자리가 아려와 슬퍼진다. 꽃은 피고 지지만, 어머니가 남긴 사랑은 이렇게 환하게 내 곁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