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어머니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내가 돌보게 되면서 한때 어머니의 활동량을 키우기 위해 동네 주간보호시설에 보내드린 적이 있다.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4시 무렵까지 목욕, 식사, 재활 등의 돌봄 서비스가 동시에 이뤄지는 곳이다.
2024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노인 주간요양보호센터는 전국에 약 1만 5,896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이는 2022년보다 2,624개소가 늘어난 수치로, 재가 서비스를 포함한 노인복지시설의 확장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머니는 3개월을 못 채우고 그만두셨다. 정말 학교 가기 싫은 아이처럼 아침마다 안 가시겠다고 버티셨다. 그곳이 싫다고, 왜 하기 싫은 체조나 게임을 억지로 시키냐고... 말은 안 하셨지만 어머니는 그때 이미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꼈던 것이다.
주간요양보호센터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다양한 연령과 상태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설계되어 있어 개인의 성향이나 관심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원생 개개인의 건강이나 지적상태를 고려할 전문가가 부족했다. 열악한 환경의 시설요양센터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전혀 맞춤형 보호가 이뤄지지 않고 획일적으로, 기계적으로 이뤄지는 주간요양센터 운영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요양원과 주간요양센터를 구분하지 못하고 부정적 생각만을 갖고 있던 어머니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았나 후회가 되기도 한다.
화장실 앞 세 곳에 설치한 안전바 주간요양센터에 적응을 못하고 다시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어머니는 더욱더 무력한 환자의 상태로 변해갔다. 특별히 드러난 지병이 없으셨기 때문에 노환이라는 이름의 마녀에게 붙들려 버린 상황이라고나 할까? 그때 어머니의 몸 상태를 더 세심하게 체크해 영양관리와 정서적 도움이 이뤄졌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어머니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다. 바깥나들이가 줄어더니 다리 근력이 쇠퇴하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셨다. 전에 한차례 고관절 골절이 돼 수술을 하셨으나 회복하긴 했는데 회복이 노쇠의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한 것이다.
거기에다 어느 날 밤, 소변을 보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발목까지 삐신 것이 바깥나들이를 줄인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사고 이후 우리는 어머니의 생활환경을 대폭 개선하였다. 여러 공간에 사고방지를 위한 안전장치를 하고 장애물들을 제거했다. 마치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를 돌보듯이 더 큰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항상 걱정이었다.
어머니는 TV에서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면 유난히 귀를 기울이다가 곧잘 따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애창곡, '고장 난 벽시계'라는 노래. 아마도 경로당이나 동네 노래교실에서 배워왔을 이 노래를 어머니는 빈 종이에 가사를 직접 적어놓고 열심히 따라 불렀다.
이 애창곡을 즐겨 부르던 어머니의 그때 심정은 어땠을까?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도 보지 않느냐
어머니의 트로트 악보, 거의 100여 곡을 직접 손으로 적어 놓았다. 나를 속인 사람보다 네가 더욱 야속하더라
한 두 번 사랑 때문에 울고났더니 저만큼 가버린 세월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청춘아 너는 어찌 모른 척하고 있느냐
나를 버린 사람보다 네가 더욱 무정하더라
뜬 구름 쫓아가다 돌아봤더니 어느새 흘러간 청춘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노래 속에서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춰버린 자신의 시간, 혹은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상징하고, '고장도 없는 세월'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냉혹한 현실을 말한다. 시간이 흘러도 멈추지 않는 삶의 무상함이 드러나는 나훈아의 히트곡이다. 빠르게 가는 세월을 트로트 가사에 얹어 그저 신나게 불러 제치던 그때만 해도 참 좋았다. 아직은 기력이 조금은 남아 있을 때였으니까.
어머니는 점점 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셨다. 예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TV의 트로트 프로와 야구경기도 눈이 아프다는 이유로 아예 마다하시고 하루 종일 누워계시니 밤에는 오히려 불면증으로 괴로워하시기도 했다. 불면증은 인지능력 저하로 이어지는 게 뻔하다. 수면제를 드시고 잠을 청하는 날 이상한 섬망증세가 나타나는 걸 알았다. 아직 치매까지는 아니어서 며칠간 정상상태를 유지하기도 하고, 다시 섬망 증세가 나타나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취미와 입맛과 감각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벤자민 버튼은 노인의 외모로 태어나 점차 젊어지며 육체의 시간을 거슬렀다. 그의 인지 능력은 오히려 나이에 맞게 성숙하여 마침내 몸은 아이가 되면서도 노인의 지혜를 갖추게 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다. 어머니의 시간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완전한 치매는 아니어서 자녀들을 알아보시고 "밥은 먹었냐"는 따뜻한 걱정의 말을 건네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신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에는 두루마리 휴지나 물티슈 같은 것이 없었다. 손에 오물이 묻으면 치맛자락에 닦고, 콧물이 흐르면 옷소매로 닦던 시절이었다. 늘 단정하고 깔끔하셨던 어머니가 어린아이처럼 손에 묻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닦아내실 때, 그것은 단순히 행동의 변화가 아닌 기억과 시간이 뒤섞인 채 과거로 향하는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붙잡고 싶을수록 더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란 뭘까?
아이들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절대 억지로 삼키지 않는다. 평생 좋은 것은 자식들에게 양보하시고, 남은 것을 조용히 드시던 어머니가 이제는 어린아이처럼 입맛에 맞는 달달한 것만 찾으신다. 달지 않은 음식은 조금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시거나, 심지어 뱉어버리시기도 한다.
문득 생각해 본다.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 서서 의식이 희미해질 때, 끝까지 남는 감각은 무엇일까? 촉각일까, 청각일까, 아니면 미각일까? 만약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미각이라면, 나는 어머니가 그 달콤한 커피사탕의 작은 즐거움을 끝까지 간직하시기를 바랐다. 삶의 끝자락에서 입 안을 맴도는 사탕의 달콤함이,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남은 행복의 조각이 되어주기를.
영양가를 따지며 먹기 싫어하는 음식을 누구든 억지로 권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본다. 하루라도 마지막 남은 미각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실 수 있기를, 달콤함 속에서 잠시나마 아이처럼 웃으실 수 있기를. 그것이야말로 어머니를 위한 최고의 보양식이 아닐까 싶다.
저녁식사 후 30분이 지나면 평소대로 혈압약과 뇌 영양제를 드리고, 당분 섭취가 해롭지 않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커피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넣어드린다.
‘맛있다.’
달달한 커피 사탕 한 알에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돌고 행복한 표정이 스친다. 마치 내 손녀딸의 어렸을 때 모습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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