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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Nov 26. 2020

요즘 악마는 '셀린느'를 사랑한다

<이제야 수요일> Chapter 8. 에디터 K의 이야기

직업인으로서 지인들을 알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꼭지를 잡아, 짤막한 에세이를 부탁했다.
직접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 담으면 더 재미있겠지만,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즈음의 사정상 카카오톡 대화로 대체했다. 그들은 직업인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그 직업을 대표할 수는 없다. 각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와 감상을 담고 싶어 욕심을 조금 냈고, 만에 하나 돌을 던질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나의 몫이다. 에세이의 주인공은, 읽는 이의 감상을 위해 공개하지 않을 예정.


모두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처럼 살 줄 알았다


학창 시절 나에게 '에디터'라는 직업의 이미지란, 명품 옷과 명품 재킷을 걸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으로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들고 출근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 속 주인공 앤 해서웨이처럼, 웬만한 슈퍼모델 저리 가라 할만한 그런 멋진 언니들이 일하는 곳. 그게 내 머릿속에 있는 매거진이었고, 내 동경 속에 있는 잡지 에디터의 모습이었다. 솔직해지자. 우리 모두가 동경했던 그 시절 '잡지 에디터'란, 패션의 정점에 있는 트렌드세터 그 자체였다.


출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이 실제 현실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최초의 영감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했다. 내 안의 고정관념들을 찬찬히 짚어 가다 문득, 이 에디터라는 직업이 새롭게 궁금해졌다. 그걸 계기 삼아 내 주변 지인 중 유일한 잡지 에디터 출신인, 뷰티 에디터 K에게 새로운 콘텐츠를 부탁했다. 어느덧 6년차 에디터(그리고 잠시 마케터였던)가 된 그녀가 들려주는 잡지사 뒷얘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했다. 에디터 출신인 만큼 유려한 그녀의 글을 그대로 전하고 싶어 이번 콘텐츠 역시 크게 손대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다. 언제나 말하듯, 그녀의 이야기가 이 직업을 모두 대표할 수는 없다. 다만 비슷한 직업을 꿈꾸고 있는, 혹은 비슷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그네들과 나눌 수 있는 한마디 위로 같은 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워라밸


FD시절부터 워라밸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단어 중 하나였다.


칼퇴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이 '회사 워라밸은 어때?'라는 질문을 하면 '워라밸이 뭐야?'라고 다시 되물어볼 만큼 에디터란 직업은 워라밸 따윈 전혀 보장해주지 않았다. 보통 출근 시간이 9시라면 퇴근은 6시. 그것이 일반 회사에서의 업무 시간이다. 하지만 에디터란 직업은 매월 중순에 월례행사처럼 치르는 마감기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길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마감일만 보고 달린다.


출처: 핀터레스트


예를 들어 12월호가 시작되면 기획안을 써야 한다. 그때는 보통 다른 회사 때처럼 출퇴근을 하기도 한다. 간혹 가다 지난달 이미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12월호를 바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후에는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 아이디어의 채택된 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해 몇 날 며칠로 취재를 하고, 미팅을 하고, 스텝을 섭외하고, 촬영을 하고, 사무실에 돌아오면 원고를 쓰고, 레이아웃이 잡힌 디자인을 확인하고, 교정 교열을 보고, 몇 차례에 걸쳐 원고를 다시금 확인한다. 촬영으로 시간을 많이 쓰면 쓸수록 원고 쓸 시간은 줄어들고, 야근은 당연한 거고. 주말 출근은 뭐 당연시 여긴다. 그렇게 마감이 되면 또다시 아이디어를 쥐어짜야 한다. 원데이 촬영을 하는 날에는 한 끼도 먹지 않는다. 촬영을 하다가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고, 그 많은 스텝들을 챙기다 보면 밥 생각은 나지도 않는다. 힘들어서 입에 먹을 것이 안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출처: 핀터레스트


한 번은 그런 일도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할머니는 부모님과도 같은 존재였다. 배우 5명을 촬영해야 하는 원데이 촬영이 잡힌 날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막 슈팅이 들어갔던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눈물을 꾹 참고 일만 했다. 할머니가 더 이상 위독하지 않길 바라면서도 나도 모르게 어딘가 싸함이 느껴져 집에 돌아가서도 새벽까지 해야 할 일들을 쉬지도 않고 쳐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점심,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사랑하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던 그 날이 에디터 일을 하면서 가장 원망스러웠던 하루가 아닐까 싶다.


이런 반복 속에서 5년 가까이란 시간을 지냈더니 몸은 몸대로 축나고, 마음은 피폐해졌다. 특히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예전에는 즐겁던 그 일들이 이제는 모르는 번호는 받기도 싫고,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새로운 자리를 기피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너무 달리다 보니 지친 건 아닐까라는 생각만 할 뿐.

 


#자아실현


출처: 핀터레스트


자아실현이라는 단어를 보고 막연하게 뭘까라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과연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뭘 이뤘나 나 자신을 되돌아봤다. 확실히 에디터일 때와 마케터일 때는 차이가 있다. 에디터 일을 할 때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것도 있지만 현장을 자주 간다. 현장에서 스텝들과 함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때는 확실히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래 이런 맛에 일하는 거지’라는 생각? 예전에 사주를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앉아서 일하는 직업보다는 돌아다니는 직업을 하라고 승무원이 딱 맞겠다고 그러면서 승무원 아니면 방송, 통신 쪽이라고 그랬는데 그 말이 지금 생각해보니 딱 맞는 것 같은 느낌. 그러다 에디터로써 보다 업무영역을 넓히기 위해 광고회사에 마케터로 들어간 적이 있는데, 현장은 커녕 그냥 사무실에서 키보드만 와다다다 두드리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딱히 보람도 없고 막무가내로 글 지적부터 하는 글도 안 써본 선임이 하는 말에 자존감까지 깎이고 있었다.

확실히 그때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뭔가
나의 자아를 찾기보다는 잃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퇴사를 하고 다시 에디터의 삶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일이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하다. 특히 현장에 있을 때는 힘들지만 재미있다. 그렇다고 이 일을 통해서 뭘 얻고자 하는 건 딱히 없다. 버는 만큼 벌고 사고 싶은 건 사고하고 싶은 건 해보는 그런 삶을 원할 뿐.


출처: 핀터레스트


#출세와명예


모든 일이 그렇지만 출세를 하려면 줄을 잘 타야 한다고 한다. 에디터의 생활에서도 그런 것들이 존재하긴 한다. 좋은 편집장, 좋은 선배를 만나야 만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출세라고 하기보다는 좋은 화보, 좋은 원고에 내 이름을 적을 수 있냐 마느냐다.


이슈가 되면 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것은 물론, 더 좋은 기회들이 찾아온다.


FD 시절에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달에 소득세를 제외한 38만 원 대를 받고 일을 했다. 그런다고 점심, 야근을 하면 저녁을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교통비를 주는 것도 절대 아니었다. 근데 그 돈을 받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꿈 하나다. 에디터로써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때는 에디터라고 하면 그래도 알아주던 시절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뭐 여기저기 다 에디터라는 호칭이 붙는다. 치열하게 살았던 예전을 돌아보면 그때 이게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싶더라.


출처: 핀터레스트


솔직히 명예도 이런 명예가 없다.
잡지가 호시절인 그때부터 에디터는 명예직이라고 했다.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가 대중적이었던 그때는 에디터들의 월급 기준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기자님, 에디터님 등이라 불리고, 브랜드들은 잡지의 한 면이라도 브랜드를 노출하고 싶어 에디터들에게 신제품을 갖다 주는 것은 물론 미팅에 대접에 난리도 아니었다고. 라떼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나 때부터 에디터들은 명예직이라고 하더라. 월급도 짜고, 누구 하나 잘 알아주는 이 없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에디터님, 기자님이라는 소리 듣고 살기 위해 이 일 하는 것 아니냐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진짜 어이없었는데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해보니까 그 말들이 얼마나 달콤한 말들이었는지 그제야 조금이나마 인식을 했다는 거다. 뭔가 더 존중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다. 그렇다고 해서 또 막연하게 출세하고 명예를 얻고 그런 것들은 딱히 원하진 않는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버는 만큼 벌고 스트레스받지 않으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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