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스스로를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나 자신을 ‘실리적 원칙주의자’라고 표현할 것 같다.
내가 정해둔 것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정해놓은 박스를 벗어나는 것들을 혐오하는 경향이 있다. 혐오, 라는 단어가 조금 강하기는 하지만, 그 박스를 넘어서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한다는 점에서는 저 단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조금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박스는 꽤나 단단해서,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도 더욱 단단해질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한 것 같다. 이 바운더리를 넘어서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었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계획’이라는 것들에 집착했다. 계획이라기보다는, ‘하기로 한 것’을 ‘하기로 한 시점’ 에 ‘모두 수행했는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숙제로 내주는 일기쓰기도 한 번도 밀려본 적이 없다. 숙제를 안 한 상태로 학교에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랭클린 플래너 쓰는 법, 스터디 플래너 쓰는 법, 예쁜 다이어리 꾸미기 같은게 한창 유행했던 중학교 때부터는 스터디 플래너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반에서 언제나 가장 열심히 다이어리를 만드는 아이였다. 쪼그마한 글씨로 꽤 많은 장을 빼곡히 채우고, 색칠하고, 스티커를 붙이는 작업을 좋아했다. 하루의 일과를 불렛 포인트로 만들어 그걸 다 지우지 못하면 왠지 제대로 산 것 같지가 않아서 찜찜해 잠들지 못하는 밤이 꽤 많았다.
언제부터 그런 성격이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성격 때문에 학창 시절 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문제를 일으키기 보다는 자리에 조용히 앉아 주어진 숙제를 하는 학생에 가까웠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런 학생이 대개 예쁨 받기 마련이다. 선생님들과 부모님이 그런 면을 칭찬해 주기도 했고, 덩달아 성적이 오르기도 했고, 그러면 나는 또다시 말 잘 듣고 성실한 학생이 되기 위해서 더더욱 계획표에 매달려 살았던 것 같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인생이 모두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라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명제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 것은 스무살 이후였던 것 같다. 학교 성적이 전부였던 중고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대학에 와보니 공부를 잘 하는 것 만큼이나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것도 중요했다. 좋아하는 음악 장르나 영화 장르도 하나쯤은 있어야만 했고, 술도 어느 정도는 마실 줄 알아야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땡땡이를 치는 유도리도 한번쯤은 부릴 줄 알아야 했다. 실력이나 노력보다는 다른 것들이 더 가치있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은 그 즈음 서서히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사실이 조금은 싫었던 것 같다. 나에게 그것은 마치, 1 더하기 1이 때로는 3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과 똑같이 느껴졌다. 1 더하기 1은 2여야만 하는데, 누군가가 3이라고 한다고 해서 3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정해진 수순과 정확한 사실 관계가 있다면, 그에 맞춰 일이 처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에 대한 질책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내 말이 원칙적으로 맞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러나 때로는 그것을 눈감아 줄 줄 아는 유연성을 발휘하기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조언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모두가 그것이 답이 아닌 걸 알면서도 입을 모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 상황이 가끔은 우스우면서도 가끔은 짜증이 났다.
인생은 스터디플래너가 아니니까,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아 넘기는 게 어른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도 스물을 넘기며 배우게 되었다. 실은 그렇게 짜증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웃어 넘길 줄도 알아야 하고, 누군가 내 박스를 넘어갔을 때 여유롭게 ‘이번 한 번은 봐드릴게’ 하는 허세도 부릴 줄 알아야겠지.
서른이 넘어가면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아마도 - 그렇게 빡빡하게 살아봤자 뭐 하나 - 하는 생각인 듯 하다. 빡빡하고 원칙에 기반한 삶은 정도를 밟을지언정, 돌아보면 주변에 남들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 그리고 그렇게 강하고 엄격하게 스스로를, 때로는 상대방을 옥죄면, 결국 나 자신도 버티기 어렵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
실은 누가 맞다 틀리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고 - 명확한 원칙주의자도, 융통성있는 실리주의자도 모두가 다 맞는 것이라고. 사실은 그 원칙이라는 것이 결국 내가 만든 틀에 불과하고, 누군가에게는 그 원칙이 틀릴 수도 있다면, 그 틀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일이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 그저 강물에 무언가가 흘러가는 것처럼 그것을 뒷짐 지고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라는 사실도 나는 서른이 넘어가면서 하나둘씩 깨닫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끼고 살았던 '그놈의 박스'를 내려놓는다는 게 왜 이렇게 힘든 일인지. 불쑥불쑥 올라오는 답답함을 내리누르느라 마음이 조금 힘들 때도 물론 있다. 이건 내가 오랫동안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살아온 데서 생기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되새긴다. 남 주려고 그런 거 아니고, 다 너를 위해서야. 너의 마음의 평화를 위한 일이다 멍청아. 뭐 아무렴 어때, 이렇게 하나씩 생각하다 보면 언젠가는 포기하게 되지 않겠어? 그러니까 이 글은, 그런 미래를 위한 나의 다짐과도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