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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민서패밀리 Sep 23. 2020

7. 운전면허 in 시카고



미국에서 힘든 일 중 하나가 운전면허 취득이다. 한국 운전면허증을 자동으로 교환해주는 주도 있지만, 일리노이주는 아쉽게도 그러지 않기에 필기, 실기 시험 다 새로 봐야 한다. 힘든 일은 계속 미루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인지라 나 역시 본성에 충실한 채 잠시 미뤄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마침 강의가 없어 쉬고 있는데 이 참에 운전면허나 따 볼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뜬금없이. 그래서 제일 가까운 DMV(자동차 면허관리기관)를 검색하여 차를 몰고 갔다. 아무 대책 없이.



DMV의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기에 길게 늘어선 줄을 기대하고 갔는데 의외로 건물 주위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안오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건물에 들어가려 했지만 경비원이 문 앞에서 나를 제지했다. 헤이 맨 클로즈드. 코로나 때문에 폐쇄란다.



아 30분이나 걸려서 왔는데..



어쩌지 하다가, 여기까지 온 30분이 아까워 또 대책 없이 차를 몰고 다른 DMV로 갔다. 근처에 가니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거 큰 일인데 라는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늘어선 줄 끝에 섰다. 처음 줄 설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건물 들어갈 때 보니 내가 처음 줄 선 곳이 건물 입구 바로 앞에 있었다. 다시 말해 줄이 건물을 한 바퀴 뺑둘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오마이갓.



암튼 이 줄의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나는 여름 땡볕에 서서 무작정 차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놀이동산처럼 여기서부터 1시간 30분 뭐 이런 것도 없었다. 그냥 주구장창 기다렸다. 영화 주토피아(Zootopia)에서 DMV직원을 나무늘보로 묘사했는데 점점 체감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2시간을 온전히 땡볕에 서 있고 나서야 나무늘보들이 일하는 시원한 건물로 들어갈 수 있었다. What a building. 들어가기 전 이미 영혼은 탈탈 털린 뒤였다. 안에 들어가서도 20분을 더 서류 작업한 뒤에야 늘보님을 대면할 수 있었다.



나의 늘보님은 건강한 풍채를 자랑하는 분이었다. 하유두잉 하면서 슬며시 말을 놓더니 일단 서류부터 내놓으라고 했다. 신분증명, 거주증명 이런 거였다. DMV에 갈 때는 동네 마트 영수증도 다 챙겨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던 터라 나는 바리바리 챙겨 온 서류들을 순순히 다 넘겨주었다. 니가 골라라.



늘보님은 이건 왜 가져온 거지, 이건 또 뭐야 하면서 하나 둘 sorting 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다다익선이라고 했다.



분류가 끝나자 늘보님은 내가 준 서류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창문 밖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을 에워싼 채로 땡볕에 서 있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숙독에 숙독을 거듭하였다. 그러더니 오케이라면서 나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나 사실 3시간 전부터 계속 너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영어말이 떠오르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쟤 수틀리면 끝이다.



잠시 후 서류 스캔이 잘 안된다면서 또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옆자리 직원과 농담하는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해학의 민족이다. 스캔에 성공하고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뒤에야 시험 보러 가라고 했다. 그 순간 고시준비하면서 외운 Red tape, 번문욕례가 10년 만에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우연인 듯했다.



늘보님 곁을 떠나 필기시험 보는 곳으로 갔다. 컴퓨터로 보는 시험이고 한국어로도 가능했다. 문제는 쉬웠고 10분도 안 걸려 끝났다. 필기시험 합격서류를 받았다.



3시간 중 2시간을 땡볕에 기다렸고 50분을 이런저런 서류 확인 작업으로 보냈다. 결국 중요한 시험은 10분도 안되어 해결했다.



한국이라면 예약시간을 정하고 와서 민원24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 신분 및 거주지 확인을 한 후에 바로 시험장 입장해서 시험 보고 나올 것이다. 많이 걸려봐야 20분 안쪽이다.



또한 서울에 사는 사람이 부산에 가서 사전투표를 해도 신분증 내고 본인 투표용지 출력해서 받는데 5분도 채 안 걸린다.



DMV에 오면 면허증과 함께 애국심을 취득한다는 옛 선배들의 말은 전부 다 사실이었다. 오늘 또 한 번 대한민국을 가슴 한 켠에 담는다.



그리고 갓한민국, 한국행정 만세를 목놓아 외친다.





ps. 이넘들아 여기서부터 1시간 30분이라고 써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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