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에 한인마트가 있다. H-Mart라는 상호의 대형마트인데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물건을 주로 취급한다. 한국 물건만 놓고 보면 어느 정도 규모 있는 롯데슈퍼 정도는 될 것 같다. 웬만한 한국 물건은 다 살 수 있지만 가격은 평균적으로 10~20% 정도는 비싸다.
H-Mart는 미국 전역에 97개 점포가 있다. 제일 많은 주는 캘리포니아주로 12개이고, 그다음은 뉴욕주로 10개이다. 내가 사는 일리노이주에는 5개가 있는데, 감사하게도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Naperville 지점이 있다. 이게 감사한 이유는 남한 면적의 1.5배인 일리노이주 안에 5개밖에 없는 지점 중 하나가 집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So lucky!
미국에 오기 전에는 가게 되면 그냥 미국식으로 먹고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그게 잘 안된다. 맛있는 시카고 피자, 파이브 가이즈 햄버거도 하루 이틀이다. 한식을 좀 먹어줘야 뭔가 먹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한인마트가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곳에서 주기적으로 한국 식재료를 사 오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꽤나 큰 삶의 질 상승을 이루었다. 가끔 집 근처 한인마트가 없어지는 악몽을 꾸면서 일어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베갯잇이 젖어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내가 미국의 다른 곳에 집을 구해야 한다면 사전에 H-Mart 지점 지도를 확인하고 이왕이면 가까운 곳으로 지역을 결정할 것 같다. 이건 진심이다.
우리 가족은 열흘에 한 번 정도 한인마트에 간다. 집 주변에 Marianos, Jewel Osco, Trader Joe’s 등 여러 대형마트가 있지만 그곳에서 살 수 있는 한식 재료는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인마트에 가게 되면 주로 미국 마트에서 살 수 없는 한국 제품 위주로 사게 된다. 포기김치, 삼겹살, 대구, 막걸리, 콩나물, 무, 파, 두부 등이 그것이다. 참고로, 스테이크용으로 손질된 대구를 사서 매운탕을 끓여먹는데, 안양 농수산물시장 106호 중매인을 잊게 만드는 최고의 맛을 낸다.
한인마트를 고정으로 가다 보니 자주 마주치게 되는 얼굴들이 있다. 특히 마트에서 일하시는 몇몇 한국분들은 저절로 얼굴이 익혀지게 된다. 따라서 계산할 때 이왕이면 한국말로 네고, 아니 인사를 나눌 수 있는 한국인 캐셔 줄로 가는 편이다. 해외에서 가족 외 다른 사람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지난주 월요일 한식 재료가 다 떨어져서 해질 무렵 혼자 한인마트에 갔다. 사야 할 물건들을 다 사고 나서 계산대를 보니 낯이 익은 한국분이 한 분 계셨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줄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 후 물건을 올려놓고 계산과정을 지켜보는데, 계산이 다 끝나갈 즈음 그분이 갑자기 내가 올려놓은 무 하나를 집더니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무 많이 필요하세요?"
갑작스러운 무 수요곡선 상승 질문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네?”라고 반문하면서 고민할 시간을 벌었다. 속으로 무는 가정당 한 개 정도가 국룰 아니었던가,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그분이 말을 이어갔다.
“아, 다름이 아니라, 100불 이상 사시면 무 한 박스를 많이 세일해서 5.99불에 드리거든요. 지금 사려고 하신 무 한 개가 2불인데, 15개 넘게 들은 무 한 박스가 많이 싸니까 필요하시면 그거 사시라고요.”
아, 할인행사였다. 순간 두뇌 풀가동해서 생각해보니, 1 곱하기 2불은 2불, 15 곱하기 2불은 30불, 그런데 쟤는 6불.. 뭐 암튼 좋은 제안같았다. 나는 합리적 계산(?)을 바탕으로 곧바로 무 한 박스 구매를 결심했다. 그분은 기뻐하며 문 앞에 있는 무 한 박스 골라서 가져가면 된다고 했다.
계산이 끝나고 나가는 길에 카트에 무 한 박스를 싣었다. 꽤나 무거웠다. 미국 본토에서 조선무 한 박스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트 문을 나와 차에 와서 뒷트렁크를 열고 무를 차에 싣었다. 그리고 차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무 한 박스를 내가 왜 산 거지?
도착해서 무 박스를 들고 집에 들어가려는데 박스무게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내에게 무 한 박스 사 왔다고 하니 “왓어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이제 무밥, 뭇국 실컷 먹게 되었다며 애써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내의 행복한 미소와 달리, 여전히 무 박스는 사온 그대로 주방에 놓여있다.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낀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나는 맨 먼저 검색창에 “무 요리”를 검색해본다. 백종원 무나물, 백종원 무조림, 백종원 무생채.. 이 분 없었으면 대한민국 요리 어쨌을까 싶다. 근데 진짜 우리 무는 어쩌나, 막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