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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캇 Mar 04. 2016

몽환적인 밤, 오타루 눈빛거리축제



오타루에 막 도착했던 낮에는 분명 청명한 날씨였건만 저녁이 가까워지자 무거운 구름이 하늘을 뒤덮는다.

구름과 뒤엉킨 노을 위로 어둠이 블라인더처럼 서서히 깔려온다. 눈발도 이따금씩 날리더니 이내 거세어진다.


해가 막 지는 시간부터 깜깜한 어둠이 세상을 삼킬 때까지 한 자리에 한참을 머문다.

조금씩 변하는 하늘빛에 세상이 옷을 갈아입고, 같은 앵글에도 수분 사이에 조금씩 다른 사진이 찍힌다. 그게 해지는 시간의 특별한 매력이다. 







일 년 전 겨울에 보았던 운하와 눈빛거리축제 기간에 다시 보게 된 운하의 야경은 너무나 달랐다. 

축제기간이 아니었을 때 오타루 운하의 밤은 어둡고 인적도 뜸했다. 그 적막을 채우고 있는 건 모진 추위 뿐이라 시베리아 벌판에 서 있는 것 같다고 적어놓기도 했는데, 이번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어둠이 찾아올수록 운하는 생기 있게 반짝였다. 그물처럼 운하 위에 설치된 촛불들이 빛나는 밤하늘을 물 위에 묘사해놓은 것처럼 아름다워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나는 바깥에서 한참 서 있는 것도 괜찮았지만 동생은 무척 힘들어했다. 

꽁꽁 얼어버린 동생의 마음은 따뜻한 라면 국물을 들이키고서야 완전히 녹았다. 


저녁식사를 하자며 동생을 달래 이끈 곳은 음식점과 카페가 늘어선 <사카이마치혼도리>.

뜨끈한 우동을 파는 식당을 찾으려 했으나 눈에 보이는 건 거의 스시와 회덮밥을 파는 가게들이었다. 본래부터 스시가 유명한 항구마을임을 알지만 따뜻한 국물음식을 포기하지 못한 우리가 결국 발견한 것은 우동집이 아닌 홋카이도의 특산물 <미소라멘> 전문점이었다.

가게로 다가가 문을 힘껏 열지만 오래된 미닫이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식당 안에서 주인아저씨가 도와주신 후에야 가게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훈훈한 온기가 온몸을 감싼다. 미닫이문 하나 사이로 이토록 다른 세상이라니!


겉보기보다 넓었던 가게 내부는 한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한가로이 비어있었다.

동생과 나는 메뉴판에 가장 인기 있다고 표시된 클래시컬한 미소라멘을 주문했다. 활달한 성격의 주인아저씨가 주문을 받으며 식당 벽에 걸린 유명인의 사인을 가리킨다. 거기에 한국 가수의 사인이 있었다. 이 식당을 울랄라세션이 다녀갔단다. 아저씨는 그들이 한국의 유명한 뮤지션인지 무척 궁금해하셨다. 
 

미소라면. 우리말로 하면 된장라면인데 한국 된장과는 맛이 달랐다.

숙주나물이 시원한 맛을 내는 라멘은 동생 얼굴에 함박웃음을 가져올 만큼 맛있었다.

"언니, 한국에서도 미소라면을 사 먹었었는데 이런 맛은 아니었어. 여기 정말 맛있다!" 


추운 날 라면 한 그릇의 힘은 크다. 우리는 포만감은 물론, 따뜻한 국물로 몸까지 데웠으니 바깥으로 나서는 걸음에 망설임도 없다. 눈빛거리축제 행사는 9시까지이니 서둘러야 했다.  








나와 네 살 터울의 동생은 눈이 많이 내리던 날에 태어났다.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생경한 기분으로 어른들 다리 사이에 서 있던 기억. 동생이 태어난 병원 앞의 커다란 눈사람에 대한 기억. 그날에 대한 내 기억의 전부다.


나는 그날부터 한 달간 이모집에 맡겨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긴 이별을 맞는 시간이었다.

그 날 병원 앞에 눈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 눈사람이 마음에 들었고, 낯선 경험을 앞두고 만난 그 눈사람은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오타루 <눈빛거리축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오타루 운하이지만, 운하보다 더 예쁜 곳은 데미야선(手宮線, Temiya-sen) 철로이다. 


데미야센(手宮線, Temiya-sen)은 19세기 후반 홋카이도의 주요 산업 기지였던 탄광에서 석탄을 옮기는 일과 바다에서 나는 해양자원들을 나르는 역할을 했다. 해당 사업이 쇠락한 후에는 화물과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열차가 다녔지만 수익이 나지 않아 1985년을 마지막으로 폐선되었다.

지금은 겨울이면 많은 눈이 쌓인 채 방치 되는 버려진 철길이다. 하지만 매년 눈빛거리축제 기간이면 반짝이는 빛을 입고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한다. 일본의 마쯔리(축제) 장소답게 입구에는 간식을 파는 노점들이 늘어선다. 따뜻한 음식으로 몸을 녹이는 사람들 사이에선 소도시 특유의 친밀감이 흐르고 있었다.









얼음 속에 박제된 꽃잎들, 눈으로 지은 겨울여왕의 궁전 같은 구조물들, 눈의 차가운 촉각을 잊게 만드는 따스한 빛, 동심을 자극하는 하트, 별, 달. 조각들을 하나하나 만들고 붙여 작업해낸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진다.


밤 추위를 떨칠 수 있는 건 신발과 장갑 속에 넣어둔 핫팩 때문만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환상처럼 반짝이는 무언가에 이끌린 마음이 추위도 잊게 만든다. 모두를 위한 축제마저 상업화에 물들어 진정성을 잃어가는 시대에 이 거리의 소박한 빛은 너무나 감미롭다. 









타인들의 미소가 내 얼굴 위까지 번진다. 무언가에 골이 났는지 우앙- 울음을 터트리는 꼬마 아이도, 손을 꼭 잡고 데이트 중인 커플들도 그저 행복하게만 보인다. 혼자라면 차가웠을 밤이 모두의 즐거운 추억으로 새겨진다.










'아, 아름다운 밤이에요!'

밤이 깊이를 더해간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작은 빛 하나하나가 더욱 선명해지고, 추위가 맹위를 떨칠수록 작은 온기마저 민감하게 감지케 된다. 지극히 몽환적인 밤이다.








데미야선 철로에서 벗어나 다시 운하를 향해 걷는다. 어느새 오후 8시가 넘었다.

상점들이 문을 닫아 어두운 거리에는 가로등과 자판기만 소리 없이 빛을 발하고 있다.

걸음을 서둘러야 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눈사람들을 만나면 영락없이 걸음이 지체된다.







잠시 가로등 아래에 멈추어 동동 흩날리는 눈망울들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너울대는 가벼움 속에 내 마음도 무게를 잃고 두둥실 떠오른다.

눈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인지, 내 몸이 하늘로 솟는 것인지.


굵어지던 눈방울들이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했다. 

밤에 퍼붓는 폭설은 길 위에 남아있던 하루의 이야기들을 은폐한다. 

묵은 흔적이 사라지고, 새로운 흔적을 받아들일 공간이 준비된다.








등불이 비추는 따뜻한 적막을 가르며 사박사박 걷는다. 

갑작스런 폭설도,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모두 아름다운 그림이 되는 밤. 

가슴에 품은 열기가 더운 입김으로 드러나고 입가엔 미소가 어리운다. 이 밤길 위에 존재하는 사람들 모두 함께 서서 눈을 맞고 있다는 것만으로 묘한 유대를 느낀다.










하루 행사의 폐장을 한 시간 앞둔 운하는 제법 한산했다. 어둠이 깊었고 추위는 단단해서 쉬이 녹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시간에 운하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자원봉사자들을 제외하면) 끝내 미련을 떨치지 못한 나 같은 여행자이거나, 늦게 찾아든 사람들이었다.  


운하 위에 그물처럼 늘어선 불빛은 위태롭게 깜박이고, 그중 일부는 끝내 어둠으로 잠든다.

폐장이 가까워 꺼진 불빛은 다시 점화하지 않는다. 도시가 적막한 어둠 속으로 잠들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운하를 걸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나처럼 DSLR을 삼각대에 걸고 사진을 찍던 백인 청년이 말을 걸어온다. 

"너 참 좋은 카메라를 쓰는구나. 네 카메라가 내 것보다 좋은 거야." 

털모자까지 꾹 눌러썼지만 추위를 참느라 찡그린 표정이다. 그 옆에는 똑같이 털모자를 눌러쓴 금발의 여자친구가 서 있다. 추위에 찡그린 얼굴이 새빨갰으나 사진에 집중하는 남자친구를 불평 없이 기다려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건 아마 사랑의 힘이었을 것이다. 함께 할 수 있다면 이런 추위는 견딜 수 있다는 뜨거운 의지.

이곳의 촛불들이 다 꺼진 후에야 따뜻한 사케를 나눠마시며 추억을 만들 수 있겠지.



오타루를 겨울에 다시 찾게 된다면 그때에도 혼자가 아니기를 바랐다. 

추운 밤,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과 운하가 보이는 술집에 앉아 마음에 담고 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는 거다. 양파처럼 외피를 하나하나 벗어나가다 끝내 울고 웃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거다. 추위에 웅크렸던 마음을 따뜻한 정종과 청량한 오타루 맥주에 탁 펼쳐 보이고 의기투합하다, 휘청이는 길을 걸어 숙소까지 돌아가 오타루의 어둠을 닮은 깊은 잠에 빠지는 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부끄럽지 않은 얼굴로 다시 만나 어깨를 툭 치며 인사를 나누고 새롭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길을 나서는 것이다. 새롭게 만날 풍경에 대한 기대를 품고. 

이런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아니, 상상이라서 즐거운 것이다. 현실이었다면 다음날 깨질듯한 머리와 울렁이는 위장, 후회하는 마음으로 다음 일정을 미루게 될 가능성이 더 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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