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dac Mar 07. 2024

잘 지내고 계시네요

다시 만난 상담선생님


1년만에 만난 상담선생님은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잘 지내고 계시네요 라고 했다. 누구의 입을 통해서든 듣고 싶었던 말, 혼잣말이나 다짐으로는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없었던 말, 한번으로 안 되어서 친구, 선배,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심리 전문가까지 붙들고 반복해서 들어야 겨우 조금씩 효과가 나타나는 말, 눈물샘을 건드리는 말.


약속을 잡고 상담을 기다리는 일주일 사이 대전문화재단 예술인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매달 만나 알티플라노 보드게임을 하는 사이인 트위터 친구 ‘토끼’와 함께 있을 때 ‘갈치’에게 연락이 왔다. 문화재단? 지난주에 임기제 직원 지원했다가 서류탈락한 게 생각나서 될 게 없는데 라고 답했다. 아차차 뒤늦게 지원사업 신청한 걸 기억해냈다. 토끼도 갈치도 애인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줬다. 

나는 뛸듯이 기쁘진 않았는데, 유재석의 건방진 신인시절 자료화면으로 맨날 나오는, 신인상에 실망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상을 받으러 가는 마음과 비슷했을까. 처음에 적어낸 500만원에서 금액이 깎여서 그랬을까? 물론 그럴 줄 알았고, 창작집을 발간하는 개인에게 350만원은 적은 돈이 아닌 것도 안다. 작년과 올해 다른 선정자들의 금액과 비교해보아도 적은 돈이 아니다. 그래도 무덤덤하다. 될 만하니까 됐겠지, 내가 잘 써서 그랬겠지, 약간 당연하달까. 겸손하지 못한 인간 같으니라구. 그런데! 다음날 아침 새벽 같이 눈이 떠졌다. 


설렜다. 올해 책이 나올 수 있다니! 밤새 갯벌에 바닷물이 차듯, 따뜻한 햇살이 땅을 데우듯, 기쁨과 감격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 눈물이 되어 흘렀다. 줄어든 예산만큼 책의 디자인과 편집을 직접해서 비용을 아끼고 책을 최대한 많이 찍어낼까, 그래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을까, 고민이 생겼지만 즐거운 골치였다. 이후 최고의 컨디션으로 며칠을 보냈다. 하루는 엄마와 언니들을 만나 효도 일정 소화하고, 주말 내내 애인과 즐거운 데이트를 하고 상담을 받기로 한 월요일이 되었다. 


지원사업 발표도 났고 하니 이제 할 일이 생겼다. 긴 우울의 터널이 끝나가는 게 보인다. 지금은 괜찮다. 올 겨울이 되면 또 이렇게 괴로울 것 같긴 하지만 지금은 좋다. 괴로운 시간도 나름 잘 보냈다. 자책하거나 비교하면서 더 가라앉지 않았고, 몸을 혹사 시켜 달리기를 한다거나 에너지도 없는데 뭘 배우러 다닌다거나 하는 식으로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그래도 하루종일 누워서 아무것도 못하겠다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과거와는 달리 보통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5년 넘게 써오는 ‘마음날씨표’에는 더 이상 최고 나쁨인 -3은 거의 없고 석 달에 -1이 두 번 정도, 보통은 +1 ~+3 사이였다. 별일 없는 날, 그냥 이 정도도 감사하고 괜찮은 날은 최소 +1이었다. 애인을 만나거나 애인 덕분에 행복한 날은 +3, 뭐라도 쓰거나 겨우 몸을 일으켜 도서관에라도 간 날은 +2였다. 나는 나의 일상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상담선생님은 우울한 시기의 내가 전과는 달라보인다고 했다. 대화 모임을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도 전보다 안정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할 일이 없으니 심심하고, 지루하지만 휴식의 계기로 삼자고 한 게 두 달 지나니 슬금슬금 불안해졌다. 한달은 재미 삼아 당근 어플로 동네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알아보았고, 한 두개 지원했다 떨어졌다. 다음 달로 넘어가자 더 적극적으로 구인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실제로 일자리를 검색했다. 할 수 있을 만한 것, 될 만한 것을 골라 지원했고 서류 통과조차 되지 않았다. 마음은 더 얼어붙었다. 그럴 때마다 이럴 에너지로 본업에 충실해야지, 더 많이 쓰고, 더 좋은 걸 쓰고, 잘 쓰기 위해 공부하고 연습하고 책을 많이 읽고, 감정이 무뎌지지 않게 마음을 잘 쓰는, 그런 사람이 되야겠다고 다짐은 한다. 쉽지 않지만.


셀프 주간 연재 <badacmoves> (시즌3. 소탐대전)와  팟캐스트 <어쩌라고> 발행은 너무 힘을 들이면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데 의의를 두고 겨우 이어간다. 오리의 도움을 받아 매주 무시래기그림회에서 그림수업을 받고, 숙제로 사람을 그린다. 모범생 유전자를 가진 사람으로서 숙제를 안 한다거나, 수업에 빠진다거나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어려워도, 울면서 그림을 그린다. 석 달이 지나니까 하기 싫어도 울지 않고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본업은 더 오래 걸리고 어렵겠지. <소탐대전>의 원고를 쓰거나, <어쩌라고>를 녹음할 때는 울지 않는다. 가 닿고 싶은 경지는 울지 않고 쓰는 것보다 훨씬 크고 깊다. 괜찮은 글을 쓰는 것, 재미있는 말을 하는 것, 그러려면 좋은 생각을 해야한다. 한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한다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다. 마음에 차게 잘 하고 싶다. 노력하고 연습하고 계속하는 게 기본이니까 일단 하는 거다. 무시래기그림회 수업에선 사람 100명 따라그리기를 연습하고 나니 중급반에 들어선 기분인데 본업에선 어떨까. 


연필농부 이보현은 <나혼자 발리>가 나온 2015년을 기준으로 하면 10년차 작가다. 이렇게 말하니 그래도 과장급은 되야 하지 않나 싶은데, 회사원이었던 3~4년을 제외하고 7년차라고 치고 아직 대리로 해야겠다. <귀촌하는 법>을 쓰고 낸 2021년부터 비로소 회사원에서 예술인으로 정체화했다. 그렇다면 4년차 대리가 맞네. 독립출판으로 1~2년 경력을 올리면 부장되고 임원되는 거 없이 바로 사장이야! 원래 본업은 어렵다. 힘들고 좋다. 두렵고 행복하다. 잘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상담선생님은 일상이 된 반복적인 일에서 보람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고 하셨다. 공기 같은 것이어서 좋은 줄 모를 거라고. 사람 욕심이 끝이 없듯 하나 하면 다음 거, 그 다음 거 아쉽게 마련이니 빠지지 않고 계속하기만 하면 좋겠다고 시작했더라도, 계속 할 수 있게 되면 잘 하고 싶어지는 건 당연하다, 스스로에게 잘하고 있다는 위안을 주지는 않을 거라고. 하긴, 맞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2015년, 자유기고가란 이름으로 글 하나만 매체에 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다. 긴 터널을 지나는 지난 겨울에도 스브스프리미엄 사까마까에는 3주에 한 번씩 꾸준히 글을 보냈다. 책도 여러 권 냈고, 연재처도 있고, 셀프 연재로 글을 계속 쓰고 있고…. 누가 봐도 잘하고 있다. 나에게 부끄럽지 않게 계속 쓰고 있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연재하는 건 끝이 있는 일이었으니 단기간에 몰입해서 글도 쓰고 일도 해냈다. 운 좋게 출판사에서 책도 낼 수 있게 되었다.  단기간에 집중하고, 마무리짓고, 성취감을 느끼는 경험을 스스로 설계할 때가 된 것 같다. 다행히 출간지원금으로 또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올해는 독립출판인으로서 살아보겠다.


이제 할 일도 있고 하니 당분간은 잘 지낼 것 같다는 말에 상담선생님은 막상 하자고 보면 바로 시작되는 일은 없을 수도 있고, 돈 들어올 일은 여전히 요원하니 3월이후로 크게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이런 솔직한 분 같으니라고. 그래도 자기가 보기에는 잘하고 있고, 잘 할 거니 힘들어지면 그때 연락하라고 했다. 괴로워지는 겨울에 다시 연락해도 좋다고. 


우울하다, 돈 들어올 일이 없어 그렇다고 글을 썼더니 구 글쓰기 과외 학생인 꼬꼬가 계란을 보내줬다. 꼬꼬는 동물복지유정란을 생산하는 양계농장에서 일한다. 흑, 역시 나는 이렇게 주변인들의 관심과 사랑과 계란까지 먹고 산다. 어제는 20~30년 경력의 기획자, 연극인, 만화인, 그림작가들의 비슷하면서 다른 각자의 이야기와 응원을 실컷 들었다. ‘바닥, 잘 할거야. 잘 하고 있어. 이게 이 생활의 기본이라는 걸 이해하고 인정해야해. 계속 불안하다가 그 시기를 전환의 시기로 삼을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아직 나도 그래. 연 단위의 예산 계획을 세워서 익숙해지도록 하자.’ 그렇다 내게는 2016년부터의 가계부 기록이 있지 않은가. 회사에 다닐 때와 다니지 않을 때의 수입의 차이,  연차가 쌓일 수록 작가 정체성으로 벌어든인 수입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원고료, 강연료, 강사료, 외주 작업비 등. 기다리는 일이기는 하지만 늘어나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은 확실하다. 그나마 기반을 다지는 중이었던 완주와 전북을 떠나 대전으로 오면서는 어느 정도는 다시 쌓기 시작해야하는 것도 맞다. 불안하지만 불안해하지 말자고 생각하지 말고, 왜 이러지 원인을 찾고 고민을 하지 말고, 날씨와 계절 같은 거라고. 벼농사를 짓는 농부가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땀흘려 일하고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엔 쉬는 것처럼, 나도 년 단위 생활을 몸에 익힐 때야. 수확이 바로바로 되지 않는 직업의 특성을 이해할 때야. 너는 이제 월급받는 회사원이 아니란다.


오늘은 7시 몇 분 전에 일어났다. 기상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좋은 징조다. 기력이 서서히 차오른다. 봄이 오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앉아서 걱정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