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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May 22. 2019

새벽

아침은 늘 그렇게 오더라 





요즘엔 자주 하늘을 봐. 쨍하고 맑은 하늘은 언제나 같은 색인 줄 알았는데 맑음의 범주에는 생각보다 많은 색이 들어가더라. 수채화처럼 옅게 물들었다가도 어느새 포스터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빛깔이 진해지는 거야. 인터넷을 열어 ‘현재 날씨’를 검색하면 언제나 동일하게 ‘맑음’이라는 단어가 보이는데도 하늘의 색은 미묘하게 계속 달라져. 포틀랜드의 하늘이 유독 그런 것 같기도 해. 시시각각 달라져서 올려다보는 재미가 있지. 생각해 보면 하늘의 색을 그저 하늘색이라고 정의해 버리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는 것 같아. 


파랗게 빛나는 포틀랜드의 여름 하늘


언젠가, 새벽 어스름에 문득 눈을 뜬 적이 있어. 온 우주가 먼저 잠을 청하면 모두가 그 고요함을 잠잠히 따르는 시간,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도 카카오톡도 드디어 모든 소란을 멈추는 시간. 새벽에 나만 홀로 깨어 있자니 어쩐지 쓸쓸해졌어. 얼른 다시 눈을 감았지만 한번 달아난 잠은 쉽게 다시 찾아오지 않더라.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 비틀비틀 거실로 나갔어. 

거실은 칠흑처럼 까맣게 어두웠어. 어서 불을 켜야지 하는 생각에 급한 발걸음을 옮기다 쾅, 무릎을 찧었어. 아픈 무릎을 감싸 안고 한동안 끙끙거리다가 다시 서둘러 걸었어. 그리고 또 어딘가에 쾅, 새끼 발가락을 부딪혔지. 그래서 다음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발을 옮겼어. 아주 천천히 걸음을 걷다보니 어둠에 가려진 것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암순응이라고 하던가, 어느새 눈이 어둠에 적응한 거야.


있잖아, 가끔은 이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움직여야 할 때가 있어. 그럴 때면 아주 느리게 걷는 게 좋아. 아주아주 천천히 가면 늦을지언정 다칠 일은 없으니까. 설령 부딪히더라도 아픔이 덜하고 말이야.


어느덧 어둠이 희미해졌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 더 또렷해졌지. 나는 불을 밝히는 대신 소파에 푹 파묻혀 창밖을 내다보았어. 그러고는 그냥 무작정 해가 뜨기를 기다렸단다. 새벽의 하늘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졌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어느새 푸르스름해졌다가 싸늘해졌다가 축축해졌어.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다시 주황빛이 되었다가 어느새 따뜻해졌다가 또 어느새 밝아졌어. 그렇게 어느새 날이 밝았지. 

새벽을 관찰해 본 적이 있니? 생각보다 더욱 흥미로운 일이야. 무언가를 자세히 살피다 보면 몰랐던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돼.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데 다시금 새롭게 느껴지고 말이야.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그런 것들을 생각했어. 


첫째, 해는 자기 빛을 한꺼번에 나눠주지 않는다.
둘째, 어두움은 갑자기 물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결론, 아침은 나도 모르는 새 찾아온다. 조금씩, 천천히, 종이에 물 스미듯 어느 한 순간에.



대학을 다닐 때 유독 좋아했던 교양 수업이 있었어.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라는 딱딱한 이름의 강의였는데 정작 수업보다는 중간중간 혼잣말처럼 들려왔던 교수님의 말을 더 좋아했던 것 같아.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노교수님이셨어. 그래서인지 나직이 뱉어내는 말 한 마디에도 어딘가 다른 힘이 있었어. 시간을 흘러가는대로 그냥 두지 않고 차곡차곡 쌓았기 때문일 거야.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흘러간 시간에서 의미를 찾아 켜켜이 저장해 가는 과정일지도 몰라. 나보다 한참 더 오랜 시간을 저장해 온 누군가의 말은 그래서 가끔 마음에 큰 반향으로 울리곤 해. 함께 송편을 빚다가 갑자기 한숨처럼 툭 떨어진 할머니의 말에 괜히 코끝이 시큰해질 때가 있지. 엉뚱한 오타가 가득한 할아버지의 문자에 공연히 마음이 저릿할 때도. 그리고 또,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인 노교수님의 사담-국가의 이념이니 이데올로기니 공동체의 연대니 하는 말이 오가는 수업 주제와 전혀 동떨어져 있는-에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날 때도. 


가장 불행할 때 말이야, 느그들이 아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때.
그 때가 가장 행복한기다. 가장 캄캄할 때가 새벽이 가장 가까울 때인 거라.
좀 있으면 아침이야. 쫌만 참아. 다 왔어, 다 왔어. 


특이하게도 청자가 있는 혼잣말이었어. 취업이며 시험이며 온갖 스트레스로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한, 당신의 눈앞에 앉아 있던 대학생들을 향한 말이었어. 강의실 저편을 바라보며 스치듯 낮은 소리로 던진 말이었는데도 정확히 모두의 마음 위로 안착했지.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져서 일부러 하품을 했어. 멋쩍게 눈을 비비는데 여기저기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어. 어딘가 어색하고 쑥스러운 기침 소리도. 아마 나는 그제야 안심을 했던 것 같다. 적막한 새벽은 어쩔 수 없이 외로운 시간이지만, 아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던 감정만큼은 혼자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 


하늘을 자세히 보았던 그날 새벽에도 비슷한 안심을 했어. 새벽이 아침이 되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거든. 빛이 어두움을 가르고 경계를 허무는 순간은 정말이지 극적이구나, 생각해보면 이런 기적이 매일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구나,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는 이 기적을 왜 이리도 무미건조하게 대하고 있는지.


가끔씩, 새벽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매일이 희뿌옇게 푸르스름하고 서늘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거야. 그럴 때마다 이제 아침이 머지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붙들어 보려고 해. 대책 없는 희망이고 지나친 낙관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믿기로 했어. 해가 자기 빛을 한꺼번에 나눠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으니까. 무작정 흐르는 이 시간을 견뎌내고 나면 어느새 살금살금 아침이 찾아오겠지. 어느새 다시 주황빛이 되었다가 어느새 따뜻해졌다가 또 어느새 밝아졌다가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에 날이 밝겠지.



아침은 늘 그렇게 오더라. 봐, 이제 곧 다시 아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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