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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Nov 14. 2019

우주의 먼지

그러나 사랑받았네



종종 챙겨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어. 패널이 함께 모여 영화의 요약본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야. 그날의 영화는 마침 <너의 이름은.>이라는 애니메이션이었고, 마침 내가 정말 좋아하던 영화였고, 또 그날따라 패널들은 영화보다 그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눴던 것 같다. 별명이 ‘빛의 마술사’일 만큼 빛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표현해 내는 감독이라면서. 풍경마다 빛의 존재감을 이토록 탁월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며.  


누군가 불쑥 말했어.

"비법은 먼지예요. 빛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수많은 먼지를 곳곳에 그려 넣은 거죠. 빛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하잖아요. 그게 바로 먼지인 거예요."

그 말을 듣는데 습관처럼 일부러 기억하던 가사가 떠올랐어.


 나는 우주의 먼지, 그러나 사랑받았네.



살다보면 가끔 내가 정말 우주의 먼지보다 못한 존재인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지는 때가 와. 지난 일주일이 특히 그랬어. 사실 나는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야. 읽고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편안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오랜 시간 수다를 떠는 게 취미인 사람. 문장에 감동받는 순간을 좋아하고, 사전을 펼쳐 하나하나 단어를 고르는 작업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골라 한 편의 글로 완성하는 일을 좋아하고, 소위 ‘아재 개그’라고들 하는 말장난을 좋아하는 사람.


내가 즐거워하는 일의 팔 할은 모두 언어와 관련된 일이었구나. 너무 당연해서 인지하지도 못했던 사실을 먼 이역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어. 한국어처럼 자유자재로 언어를 활용하지 못하는 곳에 머무르게 되니 그 재미를 반의 반도 느끼지 못했거든. 말하자면 식도락이 취미인 사람이 입맛을 잃게 된 것과 똑같은 거야. 당장 들려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매번 다시 물어야 하고, 바로 내뱉어야 할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한참을 뜸들여야 하니 재미라고는 손톱만큼도 느낄 수 없었지. ‘아재 개그’ 같은 건 그야말로 고급 기술처럼 느껴졌다니까. 어쩌다 함께 넷플릭스라도 보게 되면, 나는 아직 대사를 이해하기도 전인데 여기저기서 벌써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어. 그럼 나도 괜히 따라 웃었어. 나를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도 왠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거야. 빈 웃음을 웃고 나면 입가에는 씁쓸한 여운이 남았어. 대신 속엣말을 몰래 우물거렸지. '아, 진짜 노잼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야. 처음이 늘 그렇듯, 열정이 넘치던 때도 있기는 했어. ‘영어의 본고장에서 언제 또 살아 보겠어. 단어 하나라도 더 배워 가리라!’ 하면서 의욕이 활활 불타오르던 시기. 처음이라는 순간이 늘 그렇듯, 돌아보면 다시는 내지 못할 용기를 불살랐지.

이를테면 ‘밋업(meet up)’에서 저녁 식사 모임을 찾아 나간다든가 하는 일. 밋업은 일종의 소모임 앱이야. 어떤 주제든 상관없이 모임을 만들 수 있고, 누구든 모임을 주최해서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또 원한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이지. 물론 나는 여전히 경계심 많은 겁쟁이였지만 여행지에 덧씌워지는 필터 때문일까, 평소답지 않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는 나갈 만한 모임을 찾아 보았어. 어딘가 희한하고 독특한 사람이 모여드는 포틀랜드의 특성답게 듣도 보도 못한 모임들이 넘쳐났어. 강아지한테 책을 읽어주는 모임부터 시골 별장에 틀어박혀 서로 말도 섞지 않고 12시간 동안 각자의 창작 작업을 하는 모임, 공원에서 롤러스케이팅을 타는 모임, 쿠바의 예술 세계를 배우는 모임까지. 그중에서도 내 눈에 들어왔던 건 ‘PDX Global Women’s Group’이라는 모임이었어. 매주 맛집을 찾아가고 브런치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박한 모임이었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멋진 여성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생기는 거야. 한 편으로는 그 사이에 슬쩍 끼면 왠지 나 또한 비슷한 모습이 될 수 있을 것만 같고 말이야.


데이트라도 나가는 것처럼 좋아하는 옷을 챙겨 입고, 잘 어울릴 만한 귀걸이를 고르고, 향수까지 뿌렸던 그날 저녁. 나는 할 일이 있다는 서툰 핑계를 대며 서둘러 자리를 떠야만 했어. 더 이상 그곳에 함께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거든. 물론 기대한 것만큼 멋진 여성들이었어. 스톡홀름에서 활동하고는 있지만 포틀랜드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서 이곳에 작업실을 만들었다는 그래픽 디자이너부터 시를 쓰는 게 취미라던 타투이스트, 주말마다 놀러가는 와이너리 리스트를 삼십 개도 넘게 소개해 주던 학교 선생님, 낮에는 관광 가이드로, 저녁에는 바텐더로 일한다는 유학생까지 아주 근사한 사람들이었지.


포틀랜드의 핫한 맛집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파인 스트리트 마켓에서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할 때까지만 해도 왜인지 모를 설렘에 마음이 풍선마냥 부풀어 있었어. 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 마음은 점점 쪼그라들었어. 각 나라 특유의 억양이 섞인 영어는 알아듣기조차 힘들었고, 말들은 또 어찌나 빠른지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대충 웃음으로 때우거나 이유 없는 추임새를 더하는 것뿐이었어. 핑퐁처럼 정신없이 주고받던 대화의 호흡은 내게 질문이 돌아왔을 때에만 잠시 느려졌어. 음악과 말소리로 시끄러운 파인 스트리트마켓에서 바로 내 앞의 테이블에만 잠시 정적이 흐르는 거야. 힙하고 근사한 사람들이 나만을 빤히 바라보는 그 순간, 나는 이미 열 번도 더 했던 말을 새빨개진 얼굴로 또 한 번 꺼내야만 했어. “…Pardon?”


아홉 시도 안 된 이른 시간,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는 길이 괜히 서러웠어. 별 것도 아닌 일에 서러워하는 스스로가 더 한심하게 느껴졌지. 대체 이게 뭐라고, 진짜 별 것도 아닌데! 그런데 사람 마음이 이렇게 신기해. 즐거운 기억으로 암만 무장한다고 해도 금세 무너져버려. 정말 별 것도 아닌 일에, 작은 가시 하나 닿았다고 뻥 터져버리는 풍선처럼. 그날은 그런 날이었어. 스스로가 우주의 먼지처럼 느껴졌던 날.


빛이 들면 더욱 예뻐지는 포틀랜드



근데 있지, 요즘 내가 노력하는 매일의 목표는 딱 먼지만큼만 하자는 거야. 어차피 내가 어마어마한 우주의 아주 작은 부스러기라는 건 참인 명제이니, 나의 수많은 실수와 서투름과 실패와 미숙함도 까짓 것 그냥 정직하게 시인하고 살기로 했어. 사람 마음이 참 신기하지. 받아들이기 싫어서 밀어내던 스스로의 모습도 까짓 것 시원하게 인정해 버리면 마음이 금세 가벼워져. 마치 미뤄 두었던 숙제를 해결한 것처럼.

 

다만 먼지의 임무도 함께 기억하는 것으로 하자.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딱히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고 느릿느릿 공기 중에 동동 떠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 

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먼지. 그렇게 하찮을 수가 없지만 실은 빛을 표현하고자 했던 어떤 거장의 계획에서 만들어졌을 특별한 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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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처럼 살아야지. "오늘도 참 먼지처럼 살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하루라면 정말로 뿌듯할 것 같아. 빛의 존재를 증명하는 먼지라니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네. 


기꺼이 먼지가 되어 사랑받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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