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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zzy Oct 25. 2022

양재부터 강남을 둘러 한바퀴

가을 산책 일지

기후변화로 가을이 사라졌다. 만끽할 사이도 없이.

가을인가 하고 바랐더니 곧장 겨울처럼 칼바람이 분다.

그러다가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여름을 불러오기도 더니,

날씨가 널을 뛴다.


가을 문턱에서 친구와 양재를 걸었다.

만보 걷기.

대화 나누며 산책할 계절이 점점 짧아진다.

서초 양재 지역을

크게 한 바퀴 돌고 강남대로에 진입하니

스마트워치 9000보 알람이 울렸고

강남에 도착하니 만보였다.


출발점은 양재 프릳츠.

곳곳에 비치된 소품이 옛날 느낌 물씬 나는 카페였다

원서동 이후 양재로 두 번째 방문.

팔십년대 제과점 느낌이랄까.

프랜차이즈보다 동네 브랜드가 많던 시절,

어느 지역 시내에 찾아간, 먹을 공간 갖춘

자영업자 빵집.

물론 프릳츠도 유명 브랜드이지만 말이다.

친구는 경양식 집 같다고도 했다.

획 삐침을 제대로 한, 궁서체 타입의 글씨들.

곳곳에 포인트로 비치된 자개장, 학무늬.

표기도 예스러운 도나스 빵 소개 등,

곳곳 오래된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곳에서 산미가 진한 롱블랙을 마시며

요새 고민을 나눴다.

기억력에 관한 얘기들

기억이 희미해지고 기억을 환기하고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들.

현실과 비현실 사이,  

최근 읽은 책 얘기를  나눈 후

초밥집으로 갔다.

신수사 초밥 코스로 배를 채우며

속 깊은 얘기를 나눴고,

최근 내가 지닌 상처에 대해 털어놓았다.

사케 한 잔 탓인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이니

어떤 근원적인 슬픔에 대한 얘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배가 너무 불러서,

포만감에 지쳐 농담을 나누며 웃으며 걸었다.

(주말 저녁 정식 메뉴 2인분, 정종 하나 추가 8만원)

함께 일식을 나눠 먹은 친구와 나. 

 다 다이어트 중이었다는 것은 숨길 일.

그래도 오랜만에 특별한 식사를 하며

사라지는 가을을, 조금은 붙들고

기억하고 싶었다.

돌아가신 외삼촌 얘기를 했고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던 기간을,

친구에게 털어놓으며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사람에겐 얘기하고 싶은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고

그것이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일정 정도 그 감정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나치면 훗날 상처가 되어버린다.

혼자 너무 힘들 때 친구를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정성스럽게 서빙되는

정갈한 음식을 먹고(식당 직원 친절)

주말 밤 길게 걸었더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숲을 걸으면 더 치유 효과가 있겠지만

주말밤 도시도 한적하니 나쁘진 않았다.

마지막 코스 우동과 알밥까지, 열심히 먹었으니,

우리는 유산소 하듯 열심히 걸었다.

음식에 대한 욕구가 요새 별로 없다던 친구는,

그 말이 무색하게도 남은 음식들은

맛있게 먹었다.

다이어트의 적인 튀김조차!

살이 찐다니, 자기가 먹겠다며

마지막 남은 것도 해치웠다.

의식과 몸의 반응은 자주 다른 법이다.

그 불일치가 인생의 재미 같기도 했다.

특히 송이버섯차가 기억에 남는데,

송이버섯을 씹을 때 느끼는 맛을 그대로 버섯차로 마실 때로

변환시킨 게 신기했다.

고소하면서 동시에 쌉싸레한 풍미였다.


초밥집을 나와 양재역 사거리에서  예술의 전당 방면

우리의 산책 코스였다  주말 밤이었음에도

상가 대로가 아니어서인지

길은 한산하고 어둡기까지 했다.

통행로이지만 그다지 통행량이 많은 곳같진 않았다.

으슥한 다리 밑으로는 공공 예술 조형물이 설치돼 있었다.

자연의 새와 나무를 형상화한, 색색의 설치물.

고속도로로 나가는 길이 이어지는 만큼

좀 위험스럽기도 했는데

횡단보도에서 바삐 뛰어가버린 내게

친구는 말했다.

"혼자 살겠다고 잘 뛰네!"


어두컴컴한 대로를 지나

저멀리 예술의 전당 앞 다리가 보였다.

친구에게 예당 야경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나는 그곳을 꽤 자주 가는 편이고

친구는 가지 않는 편이기에.

예술의 전당은 공연이나 전시를 보는 이들에겐

제집 드나들듯 오가는 곳이지만

그쪽에 취미가 없으면 그저 낯선 곳일뿐)

친구가  화장실을 찾던 바람에

남부터미널 방면으로 꺾었다.


남부터미널 근처는 조용한 주택가였다.

큰 길에는 기업체나 상업시설이 배치돼 있지만,

골목 골목은 주택가였다.

남터까지 가진 않고 큰 길로 나가

다시 양재 방면으로 직진을 하다보니

아파트 주택가가 나왔고

주말에도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학생들, 학원과 스터디카페 등이 눈에 뜨였다.

아파트와 상가가 어우러진 평범한 길을 걷다보니,

느닷없아파트 바로 옆에

신라스테이가 나왔다.

굉장히 뜬금없는 위치로 보여서 웃겼는데,

비즈니스 호텔로 외국인이 찾았을 때

한국 강남 주택가에 위치한 숙소로

동네를 기억하겠지 싶었다.

외국 여행 갔을 때 시내 중심부는 아니지만

중심 거리에서 약간 비껴선 주택가

좀 움직이면 번화가로 이어지는 위치에

일부러 숙소를 잡던 기억들이 났다.

신라스테이 그랬는데,

좀 더 직진하자 바로 강남역 근처가 나왔다.

일본 체인 비즈니스 호텔 토요코인도 그곳에 있었다.

친구는 예전에 내 진술을 듣고

토요코인이 토요  코인이 아니라 토요코 인이라는 걸

알았다는데 내가 그런 얘기를 했던가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한동안 일본과 국내 토요코인 체인을

자주 이용했던 까닭에 내가 했을 법한 얘기였다.

토요코인은 값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하루 출장으로 가기 괜찮은 곳였고

작은 방이 아늑하게 느껴져서

코로나 전에 꽤 자주 혼자 이동할 땐 이용했다.

일본 관계가 경직되면서 불매 운동 있을 때

좀 뜸하게 이용했다. 유니클로와 함께.

신라스테이와 토요코인.

비즈니스 호텔들을 순차적으로 지나

우리는 강남역으로 향했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 소지섭의 영화와,

같이 일했던 이가 출연하는 영화가 나란히

메가박스에 광고판이 걸려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과거 기억 소환했고,

함께 일할 때 가장 먼저 와서

동료들을 챙기더니 결국 연예계에서

살아남는구나, 일단 캐스팅 자체가

그 사회에서는 반은 천운이라고 느끼며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요새 유행하는 처세서들의 얘기를 하면서,

우리가 불편했던 부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

사적인 관심들로 빠져 걷고 또 걸었다.

밤거리를. 자정 전에 이미 새벽녘처럼 느껴지는

잠원과 논현 사이를 걷고 걷고 또 걸으며

언젠가의 기억들을 소환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가 길을 묻자

친구는 친절히 어플을 켜고 알려주었고

나는 술 취한 이가 조금 두려웠는데

친구의 태연한 인간적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가끔 이 순간엔 진심이 아니어도 될 것만

같은 시간들마저 정중히 대하는 이들을 보면

나는 감동받곤 한다.


가을은 깊어가고 이성은 마비되고

시간은 흘러가고 공간은 유폐된다.



조만간 소지섭 주연 자백을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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