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에너지가 부족할 때면, 종종 꿈에 첫사랑이 나타나.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멋있는 사람으로 등장해 변함없이 힘내서 살라 부추겨 주곤 해. 왜 그런지 모르겠어. 아마도 존재에 대한 회의감에 휩싸이면, 스스로 어떻게든 살아갈 방도를 찾는 건 아닐까. 그게 아마도 무의식의 꿈에 펼쳐지나 봐. 출연진을 정하고 허구의 대화 내용을 정한 것도 나의 뇌작용일 테니깐.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히 살라고.
인생의 어떤 분기마다 첫사랑이 꿈에 등장해. 그러고 나면 다시 생활의 용기가 생기고, 우연히 그런 첫사랑과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과 스치기만 해도, 내 삶을 좀 더 열심히 살 걸, 더 좋은 사람이 될 걸 반성하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져.
최근 꿈에서는, 투자를 받아야 하는 스타트업 대표로 등장했어. 첫사랑을 비롯해 여러 사람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한 거야. 다들 나를 본 듯 만 듯 들은 듯 만 듯 데면데면 하며 외면하는데, 오로지 그 첫사랑만이 매우 흡족해하는 표정을 짓고선, 추가 질문을 해주었어.
첫사랑과 사랑하는 내용이 아니라, 일하는 거라니! 우습긴 한데, 그가 경력을 인정해 주는 느낌에 나는 꿈 안에서 마구 행복해 했어. 투자 회사 중역 같기도 하고 대표 같기도 한 이미지로 그가 등장했는데, 여전히 멋있고 분위기 그윽한 사람으로 나를 쳐다 보았어. 드라마를 너무 봤나 봐.
98년 소지섭은 <간직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 베스트극장에 출연했는데, 그 작품에서 지방에 사진 출사를 하러 내려온 대학생 역이었어. 그때 이른바 숲속 ‘간지’가 엄청났지. 배경이 아마도 보성 녹차 밭였던 거 같아. 푸른 자연을 배경으로 소지섭이 등장한 첫 씬은 잊을 수가 없어. 그의 사진 출사를 도와주던 시골 여자는 그에게 반해 상사병을 앓게 됐거든. 나중에 끙끙 앓고 일어나질 못해. 나도 그 농촌 여주에 이입됐나봐. 김남조 작가의 동명 수필을 모티브로 한 건데, 차밭을 배경으로 말 못하던 여자의 망설임과 꿈 많은 대학생의 자기애 표정이 뮤직비디오처럼 남아 있어. 상대 역은 배우 전도연이 맡았어. 당시 티브이를 보면서 첫사랑이 저런 모습으로 어른이 됐을 거라고 상상했어. 그 이후로 주욱 소지섭 팬이 되어버렸지. 우수 어린 눈빛이나 긴 얼굴, 과묵한 분위기, 운동한 외양 등이 그냥 첫사랑만 같아서 ... 며칠 전 서촌에 놀러 갔다가, 중앙고 근처 연예인 기념품을 파는 가게를 지나는데 어떤 친구가 내게 그러는 거야. ‘이런 거 사는 사람이 있어?’ , ‘나! 나! 지금 소지섭 탁상 달력 찾고 있었는데?’ 사실 인터넷 검색만 해도 나오는 연예인 사진이지만, 왠지 그런 가게를 지나면 어릴 적 문방구 앞을 지나는 느낌이 들면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의 사진이 사고 싶어져. 명동이나 종로 등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지나가는 길가에서 그런 기념품 상점을 보면 저절로 소지섭을 찾고 있어.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늘 꿈을 이뤄가면서 노년이 될 때까지 활동을 쉬지 않았으면 하는 것. 그게 로망이긴 해.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여전히 소지섭을 멋있다고 생각하고 소지섭 ‘숲 속의 작은 집’을 보고 또 봤음에도 또 틀어놓고 있어. 제주가 가고 싶을 때 무한정 틀어놓는 프로그램이기도 해. tvn 숲 속 예능 본방을 볼 적에는 매우 우울한 때였는데 그때 엄청 위로를 받았어. 소지섭의 숲 속 생활 관찰 예능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도 도심 속 삶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구나, 그래도 또 집에 갈 때 제일 신나 하는구나, 엄청 재밌게 보았어. 그리고 그 프로를 보고 방문진에 리뷰를 보냈는데, 보내면서 읽고 싶던 역사책 사 읽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했다가, 정말 말처럼 딱 역사책 사 읽을 정도의 상금을 받았어. (박지원, 김산, 김원봉의 책을 사 읽었지) 어릴 적에도 미사를 보고선 그걸로 시청자 리뷰를 보냈다가 상을 받았는데 그게 어떤 내용인지 이젠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덕에 친구와 호텔에 가서 뷔페를 먹은 기억만 나. 언젠간 소지섭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배경지, 호주 멜버른 벽화거리도 꼭 가보고 싶어. 내게 멜버른은 소지섭의 도시랄까? 후훗. 배우가 인스타그램에 그 지역 미술관 사진을 올려준 적도 있는데, 그 미술관도 가보고 싶어. 스타는 결국 꿈을 전염시키는 사람이지. 그런 소지섭에게도 스타가 존재했어. 바로 김성재.
소지섭은 김성재의 팬이면서 래퍼이기도 해. 그렇게 연상작용이 작동하는 바람에, 내게는 첫사랑 하면 소지섭, 소지섭 하면 랩, 랩 하면 듀스와 소지섭, 이렇게 자동 무한 루프, ‘너와 나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지지.
2017년 소지섭 힙합 콘서트 & 팬미팅 서울 편
특히 듀스의 ‘여름 안에서’를 들으면 첫사랑을 만난 듯 설레곤 하는데, 그 곡을 가장 많이 들은 땐 1994년 여름과 2020년 여름이야. 1994년은 원곡을, 2020년에는 ‘놀면 뭐하니’의 ‘싹스리’가 부른 곡으로 무한 반복해 들었어. 어릴 때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방학 때면 학원 자습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 다시 집에 가서 밥을 먹고 걸어서 또 학원에 가고, 학원에서 하루 종일 입시를 준비했어. 외고를 가고 싶었는데, 그때 혼자 산책하며 듣던 노래가 ‘여름 안에서’였어. 독서실 주변을 걸으며 이런 저러 꿈을 꾸었지. 어른이 되면... 어른만 되면 난 뭘 할 거야, 이런 꿈 ♡ 특히 그 곡을 듣다 보면 바다가 가고 싶어졌고, ‘너는 푸른 바다야’라는 그 가사가 가슴에 박혔거든. 이후로도 줄곧 ‘바다’같은 느낌이 들거나,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을 좋아했고, 지금도 불쑥 바다를 가곤 해. 훌쩍 바다를 다녀오는 일은 오랜 습관이기도 해. 정동진을 시작으로 추암 촛대바위, 오이도, 간절곶, 호미곶, 경포대, 꽂지, 을왕리, 무의도, 영도, 송도, 광안리, 기장, ... 계속계속 어느날 문득 바다를 가곤 해. 특히 해운대는 만나던 사람과 헤어지면 혼자 마음 정리하러 가던 곳인데, 바닷가 앞 길 이름이 "'구남'로"여서 웃프게 웃던 기억이 나.
우울한 마음이 널 뛰듯 동요할 땐 1994년 곡 <여름 안에서>를 듣고, 요샌 유재석, 이효리, 비 버전의 곡도 자주 들어. 2020년 리메이크 메이킹 여의도 촬영 장면도 설레어서 보고 또 봤거든. 뮤직비디오를 찍던 와중에, 유재석이 이효리에게 나 여기 있다고 하는 장면이 있거든. 그게 왜 그리 간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어. 어디 안 떠나고 나 여기 있다고 해주는 분위기가, 우정을 그리는 영화 속 영원하고 애틋한 장면처럼 남아 있거든. 예능 프로그램이었지만, 한여름 단편 영화처럼 남은 거 같아. 어릴 적부터 늘 그런 오래 가는 동료애, 업무적 파트너십을 갖고 싶었어.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스타트업 같은 분위기를 원했달까, 이과생은 아니었지만 머리를 맞대고 뭔가 만들어내서 창업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꿈을 꾸곤 했고, 그런 염원 때문에 늘 생각이나 행동이 잘 맞는 동료는 옆에 붙들어 두고 싶었어. 문화 쪽의 일을 하다보니 마음 맞는 이들과 예술 공동체를 꾸리기도 했지만, 섬세하고 예민한 영혼들과 있던 까닭에 영원한 관계를 경험해 보진 못했어. 게다가 나도 내 안에 골몰하는 타입이다보니, 결국엔 나로 귀결될 뿐, 이상적인 화합은 어렵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도 그런 꿈이 내내 사라지지 않는 갈망 때문일까.
일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지칠 때마다 첫사랑이 꿈에 등장하는 건, 유재석과 이효리가 짧게 지나가는 말로 나눈 대화처럼 내 뒤에 든든한 존재를 꿈꿨던 열망 때문였던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