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대교 북단에는 2023년 L 아파트 단지가 새롭게 들어섰어. 그 아파트 앞 정류장이 나로선 어릴 적 친구들과 버스를 기다리던 추억의 장소야. 다소 멀리 학교를 다녔던지라, 중학교 통학을 함께 하는 친구와 버스 정류장까지도 20분 정도 걸어간 뒤 거기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학교 부근에 내려서 또 걸어갔어.
정류장 부근에는 친구들과 함께 가던 노래방이 있었어. 그때 생각을 하며 한여름 밤 영동대교 북단부터 한강 부근까지 산책을 한 적이 있어. 그 길을 걷다 보니, 갑자기 옛날 미드 ‘베버리힐즈 아이들’이 떠올랐어. 거기 나온 ‘새년 도허티(1971~2024)’ 배우가 인기였어. 눈코입이 진하고 검은 머리칼에 강렬한 인상을 지녔던 이야. 친구들은 그 미드를 AFKN 채널을 통해 봤어. 그땐 케이블 TV 개국을 안 했던 때였어. 종합유선방송 케이블 TV는 95년에 이르러 도입됐거든. 90년대 초반에는 에이에프케이엔(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 주한미군 방송이 미드를 보는 통로였어. TV 채널 2번을 틀면 AFKN을 볼 수 있었는데, 난 일요일 에 주로 몰아 봤어.
베버리힐스 아이들은 미국 폭스(Fox)사에서 만든 청소년물였고, 90년에서 2000년까지 시즌 10까지 제작됐고. MBC에서도 방영을 했는데 한국 중계물로 본 건 기억이 안 나. 대사를 정확히 이해 못하면서도 미드로 본 기억만 나거든. 브랜든, 브랜다 쌍둥이가 비버리힐즈 호화 고등학교로 전학 온 뒤 일어나는 학원물이었는데, 주로 주요 인물을 둘러싼 연애 관계가 친구들과의 화제였어. 2000년대 후반 가쉽걸이 다시 인기일 때, 90년대 베버리힐스가 반복되는 느낌도 받았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하굣길에 삼삼오오 드라마 얘기를 하다가 노래방에 가서 같이 노래를 부르다 헤어지곤 했어.
그때 친구들이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넥스트의 ‘인형의 기사’였어. 10대 연애물에 빠진 여중생들의 로망곡이랄까? 나도 테이프로 내내 듣다 늘어져 버린 앨범에 들어 있던 곡인데, 지금도 가끔 들어. 리메이크 됐으면 하는 곡이기도 해. 멜로디보다는 가사가 요새 정서로 조금 리메이크되어도 괜찮을 것 같은 곡이기도 해. 랩이 들어간다든가 해서, 요새 10대 연애 심리가 들어간다든가 그런 식으로, 새로운 버전도 듣고 싶어. 신해철이 살아있다면 아마도 다시 손을 봐서 또 발표해주지 않았을까 싶은 곡이야. ‘인형의 기사’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끝까지 지켜준다는 내용인데, 심지어 그 여자가 결혼하고도 이 남자는 그 여자를 일편단심 바라보는 거지. “나는 너의 기사가 되어 너를 항상 지켜줄 거야.” ,“하얀 웨딩 드레스, 눈 부시도록 아름다운 5월의 신부여”
지금이라면 이런 가사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싶기도 해. 이젠 남녀 치환, 성별 막론 다른 관계로 치환될 수도 있겠지. 30년 전의 노래니깐, 그만큼 세상은 변하고 있고, 또 30년 전의 노래임에도 지금 들어도 록발라드 위력을 느낄 수 있지. 그땐 홍콩영화가 휩쓸던 시기이기도 해서, 친구들끼리 유덕화, 오천련의 ‘천장지구’를 교실에서 함께 보면서 소리 지르던 때였어. 극중 유덕화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마지막 힘을 발휘해, 홍콩 시내 웨딩 상점 문을 깨고 거기서 웨딩드레스를 마련해. 오천련은 그 드레스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둘은 도로를 질주하지. 기물파손, 손괴죄, 절도죄 난리도 아닌데, 모든 걸 무릅쓴 일편단심 사랑으로 포장되지. 그 와중에 유덕화가 코피를 주르륵 쏟아. 그런데 그 장면 엄청 슬프다. 지금 글로 옮기는 순간에도, ‘부끄러움은 나만의 몫인가’ 할 정도로, 뭔가 손가락이 녹아내리고 있지만, (1990년대 초반에는 그랬어. 이후로 지금껏 2020년대까지 유덕화 팬으로 살고 있어.)
사랑은 곧 죽음. 죽도록 사랑할 거야. 사랑 아니면 죽음을 달라. 사랑과 죽음은 같은 결로! 그렇게 순애보적인 사랑, 죽음마저 무릅쓴 사랑에 청소년들이 열광했고(대개의 10대가 아니라 내가 그런 걸 수도. 나와 친한 친구들^^), 죽도록 사랑하겠다는 노래나 소설이 주를 이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