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_ 너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인지 매일 듣고 싶어

by 달의 앞면

진상이 자기가 진상인 줄을 알면 진상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사실 자기가 진상인 줄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태연하게 진상 짓을 하는 게 가장 악질이 아닐까?


클라이언트로서 처음 그를 만난 날, 나는 지나치게 세세한 정보들과 강박적인 질문들로 그를 거의 말려죽이려 들었다. 걱정이 지나쳐 망상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걸 나도 알았다. 평소 같으면 적당한 수준에서 그만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집에 가서 혼자 또 이게 문제가 아닐까, 저걸 물어봤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괴로워했겠지.


그런데 내가 아무리 헛소리를 늘어놓아도 그는 이상할 정도로 조금도 시간에 쫓기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을 단 한 문장도 중간에서 끊지 않았다. 분명 내가 생각해도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조차도 여전히 중요한 얘기처럼 같은 눈빛으로 들어주었다.


그가 그렇게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어느새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던 것들에 대해서까지 줄줄 털어놓고 있었다. 그는 내가 시시각각 피가 역류하는 좌심실이나 불타고 있는 지하실, 또는 지금까지의 변론을 전부 무너뜨릴 결정적 증거 따위에 관해서 상담하고 있다는 듯 끝까지 진지하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갑자기 "내일 운석 충돌로 지구가 멸망하지는 않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수십 년 전 교양 물리학 시간에 배운 지식을 털어서 답해줄 기세로.


잠시 뒤 모든 일이 끝나자 그는 내게 필요 이상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다음 일정에 뛰어갔다. 말 그대로, 걸어가지 않고 뛰어갔다고. 하긴 내가 시간을 잡아먹어도 너무 많이 잡아먹었지. 일단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저걸 진짜로 '뛰어서' 가는 사람이 있나. 그 모습은 반짝거리면서도 못 견디게 슬펐다. 남 보기에는 인생에서 더이상 아쉬울 게 없어보이는 저 사람도 안 보고 도망가고 싶은 상대를 참아가면서, 저렇게 숨이 차보이게 과열된 뇌로 뛰어다니면서 뭔가를 제대로 해내보려고, 계속 해나가려고 애쓰는구나. 이게 영화라면 나는, 그런 사람의 하루를 한층 더 피곤하게 만드는 오늘의 빌런이고.


그런 생각에 짓눌려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는 그가 건네는 단순하고 깨끗한 호의를 늘 그렇게 한 장면 너머의 것까지 내달리는 생각들로 멀리 돌려 슬픈 것으로 받곤 했다. 그래서 쉽게 잊을 수 없었다.




나를 마주보는 타자의 존재. 상대가 내 말을 진심으로 귀기울여 들어주는 경험. 내가 지나친 생각들을 지나치게 오래 말하고 있다고, 이러면 폐가 된다고, 상대가 지쳐 나가떨어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을 때, 상대를 배려하려면 나의 생각을, 나를, 적당한 선에서 자르고 제거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치고 있을 때, ‘네 말에도 일리가 있어,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해왔는지 더 자세히 알고 싶어’라며 찬찬히 들어주는 눈빛.


그건 나에게 과거의 두 가지 조각을 떠오르게 했다.


하나는 직업인으로서의 내가 클라이언트들의 말을 이렇게 들어주지 못했다는 것.


바쁘게 돌아가는 첫 직장에서 어쩌다 보니 나는 동기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일이 많았다. 잘하는 사람에게 일이 몰리는 구조였으므로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졸렬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밥 먹을 시간도 잠 잘 시간도 늘 부족했고 새벽에 택시가 잘 안 잡혀 건물 입구에서 얼쩡거리고 있으면 경비아저씨가 “아이고, 퇴근이세요, 출근이세요?”라고 물었다.


그런 상태로 핵심에서 동떨어진 감정적인 이야기까지 성의껏 들어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적당히 말을 끊고 필요한 정보만 간략하게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정리를 부드럽고도 효율적으로 잘 해내는 것이야말로 그 일에 필요한 기술이다. 그러나 기술만 앞세우다 보면 회의가 사람과의 대화가 아니라 처리해야 할 과제와의 싸움이 되고 만다. 나는 거기서 진심을 다해 열심히 일했으나 어디까지나 내 운명과 싸우는 수준이었으며, 그것을 통해 남을 구하는 단계에 가보지 못하고 그만 둔 것에 대해서 부채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연인으로서 서로의 말을 하염없이 들어주었지만 결국 지쳐버리고만 관계들.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관계에서 경청은 겉으로는 몹시 사소한 예의 같지만 실존적으로는 더없이 거창한, 존재의 인정이다. 상대가 지금 내 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은 단 한 순간이지만 그것이 곧 과거와 미래 모두에 대한 인정이다. 이런 생각,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른 내 역사에 대한 승인이다. 앞으로 할 말, 다음에 딛을 걸음에 대한 긍정이고 응원이다.


전애인과 나는 서로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그건 상대가 내 진짜 모습을 온전히 긍정한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조금도 꾸며낼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준다는, 기적 같은 일. 그래서 우리는 연인 사이에 대화소재가 부족하다는 남들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뇌가 작동하는 한 영원히라도 할 말이 있을 것이라고 - 언제나 그냥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을 말하면 되니까 - 생각했다. 그렇게 7년을 보내고 우리가 끝내 헤어진 것은 할 말이 다 떨어져서가 아니라 더 이상 듣고 싶은 말이 남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한때나마 서로에게 내어준 경청의 경험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나는 내가 그럴듯한 말을 했는가보다 누군가가 내 말을 온전히 경청해주었음을 떠올렸다.

… 그러자 내 기억이 닿는 때부터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내게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게 하려고 투쟁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온전한 경청을 얻었다.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서둘러 말할 필요도 없었다. 충분히 생각한 다음에 말해도 괜찮았다.”

- 비비언 고닉, <아무도 보고 있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그를 좋아하게 되면서 과연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생각해봤다. 그리고 낯선 영역에서 살아왔고 다른 세대에 속하는, 꽤나 이질적인 존재인 그를 내 생에 데려다가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싶은(도무지 뭘 할 수 있다는) 건지도, 미심쩍은 마음으로 생각해봤다. 그 두 개의 답은 맞닿아 있었다. 나는 그가 자기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오래, 아주 사소한 것까지, 아주 흥미롭게, 들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와 가장 하고 싶은 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관심 가는 사람이 생기면 상대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더 컸다. 그런데 그의 경우는 왠지 모르게 달랐다. 굳이 그의 앞에서 나를 더 펼쳐놓고 싶지 않았다. 내가 처음부터 그가 보여주지 않은 모습까지 알고 있었듯 그도 의도치 않게 나의 특질을 간파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가 본 나에 대해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시절이 지독히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아, 삼십대의 그를 딱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럴 시간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라도 더 듣고 싶었다.


스스로에 대해 애정과 연민과 자부심과 부끄러움과 회한과 따스함과 또 어떤 수없이 뒤엉킨 감정들을 담아 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날이 새도록 가만히 바라보고 싶었다. 그를 알고 싶었다. 어떤 것들을 경험하고 어떻게 해서 지금의 그가 되었는지부터, 오늘은 뭘 느꼈고 내일은 뭘 할 거고 남은 생은 어떤 눈길로 내다보고 있는지까지. 내가 그에 대한 수많은 해석을 가지고 있어서였을까. 그 자신이 스스로 해석하는 그를 알고 싶었다.




앞으로 한 사십 년 정도만, 당신으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인지 매일 듣고 싶어.


최초의 기억, 소년 시절의 꿈, 오늘의 불안, 어떤 날의 희열, 주말의 계획, 눌러둔 열등감, 좋아하는 노래, 잃어버린 물건, 빛나는 자긍심, 해질녘의 피로, 사랑했던 역사, 다음 논문 주제, 미워하는 사람, 몰고 싶은 차, 모르는 단어, 사소한 불만, 더 사소한 기쁨, 그런 것들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얘기인 것처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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