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_ 내가 보는 달빛이 네 눈빛과 다르듯이

by 달의 앞면

그를 두 번째인가 세 번째쯤 보던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내가 요즘 이 문제에 예민해서,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다'고 사과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내가 예민해서 그렇다고 생각할 문제는 아니고요. 원래 사람마다 다 달라요. 똑같은 상황이어도 전혀 몰랐다고 하시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오시는 분도 있고.”


아니, 이봐,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저 당신을 지나치게 괴롭힌 걸까 봐 미안하다는 뜻인데, 어쩌면 너무 경우 없는 사람처럼은 안 보이고 싶다는 자기방어적인 말인데, 그냥 ‘네 괜찮습니다’ 정도면 되지, 그렇게 성의껏 답해줄 필요는 없잖아.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가 탁, 하고 스위치를 올리자 내가 한 번도 올라가보지 않은 다음 층에 불이 켜졌다. 모르는 영역의 모서리마다 번지는 그 빛이 너무 예뻐서 나는 한참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물론 나도 그게 나에 대한 말이 아니라 그저 그가 전문가로서 믿는 건조한 사실에 약간의 유난스런 사회적 친절을 곁들인, 가운데가 텅 빈 말이라는 걸 잘 알았다. ‘오늘 날씨 좋네요’ 같은 말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고. 그는 자기가 그 말을 한 걸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말이 너무 좋았다. 며칠이면 시들 것을 알아도 꽃병에 꽂아두는 꽃처럼,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색깔이 좋았다. 순간과 영원을, 호의와 진심을, 과학과 낭만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 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바보 같은 얘기지만, 내가 평생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형식적으로라도 좋으니까 그냥 누군가 내 앞에서 실제로 그 말을 발음하는 장면을 꼭 한 번만 보고 싶었다고, 우리는 모두 다른 것뿐이니 네가 너인 것을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듣고 싶었다고 - 그때 알았다.


물에 잠긴 기분이 된 채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 건물은 특이한 평면에 주차 칸을 최대한 많이 만드느라 주차선이 퍼즐처럼 엉망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다 차를 집어넣으려면 접거나 구겨서 넣어야 할 것처럼. 나는 그 선들의 불규칙한 리듬까지 좋아했다. 낡아서 드문드문 칠이 벗겨진 어두운 지하주차장 바닥에 온통 색색의 별가루가 뿌려져 있는 것 같았다. 생일이 서로 다른 별들은 저마다의 표정으로 차갑거나 뜨겁게 빛났다.


그와 아주 멀게라도 맞닿아 있는 모든 무상한 것들까지 사랑했다.


8월이 격렬하게 자신을 주장하고 있었다. 바깥이 아닌 지하에 세워두었는데도 차 안에 고여 있는 공기는 거의 끓어오르기 일보직전이었다. 사방에서 공기, 더운 공기가 공기답지 않은 부피와 질량을 가지고 나를 짓눌렀다. 무언가 나를 짓눌렀다.


아니, 꼭 이렇게까지 강박적으로 전부 확인해달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나? 도대체, 내가 이 악물고 살고 이 악물고 자는 불행한 인간인 걸 저 사람한테 이렇게 다 내보일 필요가 뭐란 말인가… 돌이키고 싶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있었다. 잘못된 판단들, 멍청한 행동들, 의외의 결과들, 불안한 전망들, 취소된 감정들, 그건 단지 네가 예민해서가 아니냐고 묻던 누군가의 얼굴이라든가…


“내가 예민해서 그렇다고 생각할 문제는 아니고요.”


그게 이런 뜻은 아니었는데. 앞으로 마음이 파산할 때마다 그 목소리가 내 안에서 이렇게 위로할 작정인가.


“원래 사람마다 다 달라요.”


폭발할 것 같은 머릿속에서 그가 자꾸 말했다. 지나치게 또렷한 발음으로, 전부터 알던 사람 같은 눈빛으로, 처음의 농담과는 너무 다른 견고함으로.


이게 대체 무슨 멍청한 짓이야, 나 무슨 애정결핍이라도 있었나? 통신사 콜센터에서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고 전화 받아주면 그쪽이랑도 사랑에 빠질 건가?


하지만 나는 이게 어떤 작용인지 선명히 알았다. 이미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었고 - 말했잖아, 내가, 너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 세상만사를 이야기로 만들려 드는 내 무의식은 진작부터 뭔가 단서를 하나 잡아서 그를 사랑해버리려고,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 논리적으로 사랑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내가 왜 좋아?”라고 물으면 철학 심리학 문학으로 책을 세 권이라도 써줄 수 있는 사랑을 하려고.


‘아무나‘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굳이‘라고는 할 만한 사람인데도, 그의 무엇이 내게 특별한 울림을 주어 사랑할 결심을 하는 순간 돌이킬 수가 없다. 어떻게든 결국 사랑해버린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그 사람을 중심으로 온갖 우연과 상징이 쏟아진다. 작가로서의 내가 인물로서의 나를 속이고 있다. 이것은 기획된 사랑이다. 심지어는 그것을 어느 정도 의식한다. 하지만 영화가 허구인 걸 알아도 스크린의 픽셀은 눈에 시각정보를 그대로 전달한다. 파랑은 파랑. 초록은 초록. 사랑은 사랑.


관계의 실체가 비어 있는, 대상 없는 사랑. 그러나 환상이라느니 착각이라느니 할 수 없을 만큼 그 어느 때보다 개념적으로 명료하고 감각적으로 생생한 사랑.


그런 사랑에 적확하게 필요한,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말. 내가 보는 장미와 당신이 보는 장미의 색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 같은 불에 집어넣어도 더 빨리 타버리는 심장이 있다는 것. 모두 똑같은 것을 욕망하고 차이를 감추려고 기를 쓰는 문화에서, 그런 믿음으로 살고 싶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건 충분히 어려운 일이었다. 생의 모든 순간이 돌아가는 믹서기에 손을 넣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하필 거기서 그 말을 해버린 건, 그 순간 나에게 그것이 너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진짜. 그 단어가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그것이 필요에 대한 대답으로서 나타나주었다는 사실 말이다. 현실은 고정된 것이며 내 갈망에 완전히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준비가 거의 끝난 나이였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닫히는 문틈으로 발 하나가 디밀어진 것이다.

- 니콜 크라우스, <어두운 숲>


그렇다면 나는, 이 모든 일의 귀결이 어디든, 내가 평생 찾아헤맸고 그가 본의 아니게 확인해준 바로 그 기준으로 살아가야 한다. 남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또 나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는 동안, 너도 어딘가에서 계속 걸어가겠지. 늘 오늘이 온 마음을 다해야만 해낼 수 있는 시작의 날인 것처럼, 여전히 깨끗한 결연함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남은 날들은 충분히 환할 거야, 정말이야.


“예로부터 내려오는 다음의 진리를 너무도 자주 간과하려 든다. 즉, 한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롭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닫아야 했던 문은 여나, 열어야 했던 문은 닫아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 융
“인간이 자기 기획의 특이한 성질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기획 자체를 죽이는 것이다.” - 보부아르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나 상황을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 경우나 상황은 그 사람들의 성격에 맞을 뿐이고 그의 성격에 맞는 것은 아니다. … 왜냐하면 물고기에게는 물 속만이, 새에게는 공중만이, 두더지에게는 땅 속만이 행복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적절한 분위기만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이전 06화경청_ 너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인지 매일 듣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