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내 문제를 들여다 볼 때 매번 헤매는 지점이 있다. 내가 가진 어떤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그들은 경력이 길든 짧든 나에게서 그것을 도저히 한 번에 짚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예컨대 그 직업이 세무사라면 나는 조세목적상 거주지가 여러 개라 계산을 틀리기 쉬운 사람이고, 간호사라면 나는 도무지 주삿바늘을 찌르기 어려운 혈관을 가진 사람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거의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같은 지점에서 틀렸다. 사소한 문제였기 때문에 다들 금방 바로잡았고, 그러면 그만이었다. 나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그도 거기서 똑같이 미끄러졌다. 고쳐보려고 했는데 또 틀렸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오늘 이게 왜 이렇게 안 되지...?"
나는 그에게 '오늘' 안 되는 게 아니라 '나라서' 안 되는 거라고, 나의 어떤 특성이 모든 사람을 예외없이 거기서 삐끗하게 만든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럴 때 연차와 소속을 불문하고 다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시도하고 자기 실수를 무마했을 뿐, 고작 그것 좀 틀렸다고 내게 죄송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고.
놀랍게도,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왜 너는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일에 사과하는 사람일까.
그러지 말지. 그러면 내가 너를 잃기가 너무 아픈데. 잃는다니, 가진 적이 없는데. 아프다니, 이 따위 저급한 신파는 웬만하면 안 쓰고 싶은데. 하지만 나보다 십 년씩이나 더 살았으면 너도 알 거 아냐, 이런 거, 진짜로 감각적으로 통증이 있다는 거. 사람이 아프면 아프다고 자꾸 입 밖으로 내뱉고 싶다는 거.
金継ぎ(킨츠기)라고 들어봤어? 깨진 조각을 이어 붙이고 그 자국 위에 금가루를 뿌려 장식하는 일본식 도자기 공예. 나는 그렇게 산산조각나는 감각을 느끼지만, 그 위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것은.
네가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누구에게도 버림받지 말고.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말고. 언제나 안전하게. “인생은 비겁하게.”
그는 자기 한계를 숨기고 관계의 우열을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답을 모를 땐 그저 선선히 인정했다. 그게 역설적으로 그를 더 견고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내가 가진 실력에 확신이 있으니, 그 너머의 것까지 가지고 있다고 꾸며댈 이유가 없다’라는 식으로, 진짜 자신감을 가진 사람만이 그렇게 인정할 수 있다. - 참 내가 써놓고도 우스울 정도로 지나치게 선해하는 것처럼 들리네. 그런데 난 그냥 정말로 그렇게 느꼈다고.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너를 한 번 볼 때마다 지능이 3%씩 줄어드는 병이라도 걸렸나. 하긴, 나는 평소에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좋아해. 일할 때도 거창한 타이틀을 단 상급자들이 ‘이건 제가 잘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라고 겸손한 표현을 택하면 난데없는 충성심이 샘솟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도와주게 된다.
우리 업계에서는 웬만해선 클라이언트에게 '모르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원인에 대해서든 결과에 대해서든, 모르는 것은 일단 최대한 아는 척한다. 불확실한 미래의 전망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능성이 51:49라면 그 1의 차이를 가지고 어떻게든 그럴 듯하게 설명한다. 일의 속성에서 오는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에게 물은 것과 똑같은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했을 때 답이 달랐으니까. 그는 ‘네 말도 일리가 있다, 나도 백프로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네가 몰라서 그렇지 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확실하다’라고 말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그와 그의 업계에서 내가 만났던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대하는 방식이랄까, 아니면 그 일에 연루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랄까, 여하간 어떤 디테일이 꽤나 달랐다. 일부러 따져보지 않아도 저절로 비교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그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남들은 당신만큼 잘하지도 못하고, 당신만큼 신경을 써주지도 않더라고. 그러자 그는 '다들 마찬가지로 노력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음 번에 볼 때 내가 깎아내린 그의 전임자가 해놓은 일을 굳이 언급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이 정도면 일의 완성도가 '백 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내가 던진 모든 말 중에서 그가 '받아주지' 않은 유일한 말이었다 - '다른 사람들은 너보다 못하더라' 라는 말.
자기 분야에서 한가락 한다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자기의 대단함에 취해 있느라 다른 사람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결국 무엇을 쌓아왔든 소용없이 인격적으로 시시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구식 게임에서 능력치를 나타내는 막대 그래프 같은 걸 상상해보자. 어떤 캐릭터가 ‘시시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 채워야 하는 칸이 100개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능력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 시시함 때문에 100개의 칸을 다 채우지 못한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라면 '전혀 의식하지 않을' 도리야 없겠지만 적어도 겉보기에 그랬다.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보지 않았다. 적어도 겉보기에 그랬다. 그래서 시시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칸이 채워져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그의 실체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게 그렇게 보였으므로 그것은 나를 흔들었다. 그러니 내 세계에서는 그게 진실일 뿐. 어떤 사람이 내 눈에 어떻게 비치고 어떻게 해석되느냐는 결국 두 주파수의 공명관계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따라서 오독마저 나름의 유기적인 진실인 셈이다.
내가 바삭바삭 부서지고 있을 때도 그는 '저 사람 지금 제정신이 아니네' 하고 나를 경멸하는 대신에, 그저 한참 동안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것을 이해할 때까지. 이윽고 내게 ‘아, 이것 때문에 그랬구나.’라고 말했다. 오히려 내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다가 그가 찾아내준 단서들로 나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아무 문제 없는데 나 혼자 미쳐 날뛰는 게 아니라 진짜로 문제가 있었구나, 세심히 들여다보지 않아서 찾지 못했을 뿐이구나, 하고. 그렇게 해명되는 기분은 비할 데 없이 벅찼다. 그게 자꾸만 나의 전체에 대한 상징적 장면처럼 읽히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아무나 풀 수 없는 문제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나라는 인간도 그럴까, 하고 막연히.
그는 내 결함도 편견 없이 받아줄 수 있었고 열살 스무살 어린 애들과도 거리낌없이 친구로 지낸다. 선입견도 없고 과잉해석도 없고 꼬인 데도 없고 그렇게 투명하고 좋은 사람이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지 말아야 할 순간에 아무렇지 않게 내 글을 칭찬하는 사람이다. 적당히 초면인 척하는 게 나을 자리에서 남들이 다 알 만큼 당황하면서 굳이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사람이다. 내가 지금까지 영혼의 정원 안에 들인 사람들은 유리 실을 엮어 틀을 짜고 가운데에는 폭죽을 넣은 램프처럼 지나치게 꼬이고 지나치게 복잡하고 지나치게 작열하는 사람들이었다. 말 한 마디를 하면 그 안에 수천 개의 밤이 들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면을 들춰 글을 쓰는 대신 분명하게 보이는 표면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는 어떻게든 끝까지 나를 존중하려고 했다. 내가 스스로 나를 밀어넣은 곳보다 하나 더 높은 칸에 나를 올려두고 가려고 했다. 경멸할 법할 때 경멸하지도, 이용할 법할 때 이용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 정작 내가 작별을 작별로 매듭짓지 못하고 맴돌면서 자꾸 내 자리를 끌어내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엽서처럼 완벽하게 남을 수도 있었을 새하얀 눈밭에, 서성이는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힌다. 지금 이 글처럼.
하지만 신기하지 않아? 이토록 생생한 사랑이 어떻게 아무 실체 없는 것일 수가 있을까. 아. 예쁘고 쉬운 말로만 풀어쓰기 정말 피곤하네. 집어치워야겠다. 들어 봐. 당신은 그 물성을 이해하나? 내가 당신을 너무 분별 없이 미화하는 것 같겠지. 내가 '인간'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모든 것을 조금 멀리 있는 당신에게 억지로 투사하는 것 같겠지. 하지만 그렇게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사랑이야말로 당신을 왜곡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내게 속하지 않으니, 만약 당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냥 지나가면 될 뿐, 굳이 당신을 '좋은 사람'으로 포장할 필요가 없다. 내가 당신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으니, 당신을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풀릴 필요가 없다. 그렇게 당신은, 내게 좋은 것일 필요가 없음에도 좋은 것으로 보여. 필사적으로 선해할 필요가 없는데도 선해가 돼. 그런데도 그것이 정말 다 내 창작 - 더 잔인하게 말하자면 ‘집착’ -일 뿐인가?
마치 생의 핵심이 카뮈가 말하는 “불모의” 것에 있다는 사실과 같다. 원래 사랑을 해부하면 그 안은 공동(空洞)이다. 모든 것은 정동(情動)이고 논리화된 파토스고 정밀한 상징이고 달리 말하면 픽션, 날조, 증명되지 않은 것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신앙. 그 매개체인 대상은 쇠락의 초입에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있는 육체일 뿐. 이해라고 착각하는 오해만이 가능한 타자의 떨리는 정신일 뿐. 그 실체에 뭐 대단할 것이 있나. 그러나 바로 그것을 사랑해. 내가 본 당신을 있는 그대로, 기대 없이, 효용 없이, 아무런 요구 없이, 사랑해.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당신을 사랑해. 이름을 부르고 싶어.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내가 선택한 사람들은 다만 자신을 남김없이 다 소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 혹은 스스로를 남김없이 소진한다고 나에게 의식되는 그런 사람들뿐이다. 더 이상의 것은 없다. 지금으로서는 사고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다 같이 미래에 대하여 기대를 걸 것이 없는 세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부산하게 활동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은 희망을 그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러므로 단 한 가지 거짓되지 않은 사고는 미래의 열매를 기대하지 않는 불모의 사고이다. 부조리의 세계에서 어떤 개념이나 삶의 가치는 그것의 불모성에 의해 측정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