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_ 지금의 네가 되기까지 버텨낸 것들

by 달의 앞면

그는 나보다 7년 반 일찍 박사학위를 받았고, 나보다 훨씬 오래 일했다. 그를 만날 무렵 나는 이미 내 일에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그의 일과 나의 일은 전혀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다. 어쩌면 가장 보람을 느낄 수도 있을 바로 그 지점이 나에게는 가장 어려웠다. 긴장도 과로도 불확실성도 괜찮았지만, 서슴없이 쏟아내는 무지와 이기심을 받아주는 과정은 숨막혔다. 그래서 연봉을 반토막 내면서 클라이언트를 직접 만나지 않는 직장으로 도망쳤다(물론 다른 이유들도 많았지만).


"저번에 말씀하신 거,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나는 내가 그렇게도 피하고 싶던 최악의 클라이언트처럼 그에게 바보 같은 질문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가고 나서도 한 번 더 생각해봤다고. 굳이 그럴 일이 아니었는데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일로든, 관계로든, 그 어떤 맥락에서든, 살면서 나한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나봤나. 치킨집에서는 닭이 적당히 익을 때까지만 튀길 테고, 변호사는 적당히 이길 수 있을 만큼만 소장을 쓸 테고, 제설차는 적당히 안 미끄러질 만큼만 눈을 치울 텐데. 심지어 7년을 만난 전애인과 나는 막판에 가서는 서로 적당히 차이지 않을 만큼만 노력을… 말을 말자.


일 년차 때 내가 일에 필요 이상으로 공을 들이고 있자, 이 년차 선배가 킥킥거리며 물었다. "지금 예술하세요?" 그렇게 모든 걸 100퍼센트로 만들겠다고 덤비는 건 에너지 낭비라고 했다. 이 년차만 되어도 다들 그렇게 말했다. 물론 나도 이직을 하고 나서 이런저런 사정(핑계)들로 인해 일에 전부를 쏟아붓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아직까지도 최선을 다하나. 나는 그를 보면서 궁금해 했다. 저 사람은 대체 왜 포기하지 않는 걸까? 무엇이 저 사람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걸까? 효율을 몰라서, 힘들지 않아서 그런 것일 리가 없다.


삶에 대한 성의, 사람에 대한 선의, 그런 뜨거운 것 때문에 별 수 없이 그렇게 하고 마는 것이겠지.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 주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되도록 근사한 것을 주고 싶다, 그게 한 인간으로서 괜찮게 잘 살아내는 방식이니까.' - 이런 마음이겠지.




나는 너를 볼 때 늘 너의 현재만이 아니라 네 안에 쌓여있는 긴 시간 전체를 한꺼번에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잠겨죽을 것 같다고.


그걸 뭐라고 부르나, 석박사가 졸업가운 위에 두르는 색색의 깃 같은 거. 내 단과대학의 무거운 색깔과 다르게 뜬금없이 발랄한 색깔의 그것을 걸치고 하얗게 부서지는 겨울 오전의 햇빛 아래 서 있는 젊은 너의 단체사진을 가지고 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 - 시간이라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이렇게 계속 해나가는 거구나, 나는 내내 몰랐네. 내가 북독일의 호수 앞에서 혼자 글뤼바인을 마셔대던 시절에도 너는 그 건물에서 똑같은 신발에 똑같은 머리로 지겹도록 같은 일을 하고 있었구나. 일이라는 것이, 직업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이렇게 오래 포기하지 않는 거구나. 첫 직장을 단 몇 년만에 버린 나는 여태 몰랐네.


이렇게 보고 있으면 말이야, 인간이 삶으로 그리는 궤적이,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이, 유한성이, 그 유한성에 대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도전이, 소망하거나 좌절한다는 것이, 지독히 어려운 것을 오랫동안 배우고 익혀 남을 돕는다는 것이, 한 분야를 삶 전체로 오롯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자아를 완성한다는 것이, 다음 세대를 키운다는 것이, 우주가, 사랑이, 살거나 죽는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슬픈. 나는 자신이 없는데.


내가 너의 인생 전체와 사랑에 빠진 것 같은데, 아니, 너를 통해서 인간이 하루하루 의미를 만들며 살아나간다는 사실 자체를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것 같은데, 이런 멍청한 일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끝낼 수 있을까. 사랑해 - 나는 이 말을 아주 절망적인 방식으로밖에 할 수 없겠지.




그가 모르는 나의 학부 전공은 영문학이다. 그 말을 들으면 그는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하려나, 아니면 의외라고 하려나. 영문과 어느 교수님의 은퇴를 앞두고 나는 또 편지를 썼었다. 누군가가 자기 직업의 여정을 마치는 순간에 거기 마땅히 있어야 할 문장을 쓰고 싶었다. 그런 문장을 내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쓰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교수님의 답장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다시 젊어진다면 나는 살아낼 자신이 없다, 한 번은 했지만 다시는. 너는 잘해라. 잘할 거라고 믿는다."

나는 그 말을 자주 떠올렸다. 어떤 실패 뒤에는 더 자주 떠올렸다. 내가 생을 상대로 걸었던 내기는 여기까지라고 생각되었다. 불리한 전략임을 알면서도 지켜온 원칙이 있었고, 그런 식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예상한 바였다. 나는 원칙을 버리느니 실패하기로 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지나치게 소모적이었다. 더 이상은 억지로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은 했지만 다시는. 첫 직장 동기가 그의 업계에서 늦깎이로 커리어를 새로 시작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동기의 도전을 응원하는 한편, 내 삶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 번은 했지만 다시는. 다시는.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끝난 나는, 다시는.


내밀한 감성이 담긴 문장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우리는 상대가 그 문장에 공명할 거라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준다. 교수님은 왜 나에게 그렇게 진솔한 문장을 주셨을까. 너무, 너무 아득히 공명한 나머지 슬픔과 의지와 절규와 희망 따위가 전부 뒤섞여, 지진을 겪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위태롭게, 온갖 빛깔로, 흔들렸다.


내가 그에게 '당신이 이렇게 빛나는 사람인 걸 알았으면 좋겠다' 운운하는 글을 써줬을 때 나도 그가 그런 유치한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일 거라는 나름의 계산을 했다. 상대적으로 언어의 해상도가 낮은 사람일 테니 좀더 키치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써야지, 의외로 꽤나 서정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니 이 정도 비유를 써도 되겠지, 하고 딴에는 열심히 이런저런 추측을 했다.


내 감정만 내던지는 글이 아니라 그래도 조금은 선물 같은 기억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이야 아무 의미 없겠지만, 나를 빼놓고, 그가 누군가 자기 모습을 더없이 아름답게 그려준 초상화를 간직하기를, 그게 그가 넘어지는 날에도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는 데 약간의 재료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비록 친구는 이렇게 힐난했지만.


"야, 저 아저씨는 자기가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지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 그런데 너는, 너는 아냐? 네가 '빛나는 사람'인 거? 재능 낭비 좀 그만 하라고."


내가 그를 바라보던 시절은 그의 삶에서 젊음과 성취라는 두 개의 선이 교차하던 잠깐의 여름날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면 그만큼 완성되어 있지 않았을 테고, 조금만 더 늦게 만났다면 그의 시절이 가장자리에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게 보였을 것이다. 내가 그 틈새에 너무 정확하게 도착한 탓에, 내가 본 그의 여름은 흠 잡을 데 하나 없이 그저 찬란했다. 스스로 알든, 모르든, 나는 그가 가장 빛나던 순간의 증인이다.


이상하게도, 자기 삶의 가장 아름다운 정점에 있는 사람이란 너무 슬픈 것이었다. 나는 괜히 눈을 맞추고, 묻고 싶었다. 있잖아, “너로 사는 게 지칠 때는 없어?”* 사람들이 다 너에게 답을 물어대면, 너는 누구에게 답을 물어?


한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모습이 될 때까지 참고, 걱정하고, 버티고, 고민해온 아주 긴 시간을 한꺼번에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그를 볼 때마다 나는 자꾸 울고 싶었다. 그도 ‘다시는, 한 번은 했지만 다시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할까. 우리 모두 너무 애쓰지 않는 삶을 택하는 편이 더 나았을까. 아니면 그는 나와 달리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이력’을 가지고 있으니 적어도 그런 방면으로는 마음에 구멍이 없으려나. 그런 걸 한 번쯤 물어볼 기회가 영영 없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금세 또 한 계절이 지나갔고, 그 사이에도 우리는 내내 노력하고 있었다.




* 맥스 포터, <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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