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직장동료 H가 그와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도 굉장히 극적으로 알게 됐었는데, 말하자면 길다.)
H를 ‘직장동료’라고만 칭하는 건 썩 정확하지가 않다. H는 나를 ‘천적’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다른 직장동료는 나를 ‘여자 H’라고 부른 적이 있다. H와 나는 세상의 온갖 것들에 대한 가치판단이 너무나 비슷하다. 나는 그 사실을 좋아하고, H는 그 사실을 싫어한다. 학교 다닐 때는 150명 중에 5명만 응시한 선택과목 때문에 옆자리에서 시험을 봤다. 업계에서는 비주류에 해당하는 특이한 직장에서 서로 인수인계를 했다. 학회에서는 누군가의 아첨하는 건배사를 듣고 ‘토할 것 같네’라고 생각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옆에서 H가 ‘토할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런 일들이 계속됐다.
좋든 싫든 아무래도 우리는 같은 재질이다. 그래서 우리가 둘 다 그를 좋아하는 건가.
아무튼 그런 H가 독일 파견을 가면서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쓰게 되었고, 독일이 그리운 나는 H의 게시물을 자꾸 클릭했다. 그러자 인스타그램은 나를 비웃듯이 내 추천 목록에 그의 계정을 띄웠다.
아, 이런, 빌어먹을.
누가 봐도 그의 것임이 분명한 이니셜이 떠 있었다. 반가워하기 전에 알고리즘의 멱살부터 잡고 싶어졌다. 이게 이렇게 뜨면 내가 안 눌러볼 수가 없잖아. 그런데 내가 이걸 눌러보면 너무 스토커 같잖아. 그렇다고 내가 안 눌러볼 수는 없잖아. 그치만 그 사람 입장에선 내가 보기를 원하지 않을 거잖아. 그래도 원래 이런 게 다 ‘보라고’ 올리는 거잖아......
프로필 사진은 비어 있었고, 나는 눌러봤자 아무것도 없거나 비공개 계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무슨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웬 사십대 남자의 인스타를 염탐할까 말까를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게, 말이 되나? 이게 지금, 뭐, 그런 건가, ‘내 올해로 여든이 되었어도 마음만은 열여덟이라오’, 이런 거?
하루 정도는 참았다.
근데 하루 정도만 참았다.
그의 계정에는 뜻밖에 귀여운 것들에 대한 취향이 가득했다. 게시물이 잔뜩 올라와 있는 것 자체가 예상 밖이라 나는 당황했다. 달과 고양이,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어떤 것들. 그런 걸 좋아했구나. 갑자기 어디선가 멸종한 매머드 같은 게 불쑥 나타나 내 심장을 쿵 밟고 지나갔다. 이런 사람이구나. 사진 몇 장으로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리석겠지만. 그래도 모든 게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데. 처음의 그 어린애 같은 말투, 어떤 소문들, 어떤 눈빛들. 이런 사람이라서 그랬구나.
아니, 너는 이런 걸 올려두면 안 되지. 그 나이 또래의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답게 위스키나 골프장 사진 같은 거나 올려뒀어야지. 자기 자랑이나 늘어놨어야지. 달 관측이라니. 추석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출근해서 슬프다고 징징대는 글이라니. 회사 앞마당에서 길고양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는 인간이라니? 남들이 재산 얘기를 할 때 사랑 얘기를 하는 사람이잖아. 그래, 아닐 수도 있지, 그런데 내 눈에 그렇게 보이잖아. 너무 선명하게 보이잖아. 이러면 내가 너를 어떻게 잊나?
한 사람은 이천 피스 퍼즐처럼 혼란스러운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진다. 때로 그 조각들은 피카소의 그림처럼 동시에 온갖 방향을 바라보고 서있다. 그때그때의 사회적 맥락에 따라 주어진 역할은 같은 사람에게서 놀라울 정도로 다른 모습들을 이끌어낸다.
나는 그를 여러 가지 역할로 만났다. 처음 만난 곳에서는 그의 후배들 앞에서 그가 내게 설명을 했지만, 또 다른 데서는 그의 선배들이 잔뜩 있는 자리에서 그가 내 설명을 들었다. 내가 상황을 억지로 그렇게 만들었다. 멍청한 클라이언트 노릇만 하기는 싫어서. 내가 가진 알량한 지위와 전문지식과 과단성과 뻔뻔함을 전부 끌어다가 최대한 그의 삶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에 가봤다. 생각보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 그의 앞에서 모르는 것도 떠벌리는 사람이었다가, 아는 것도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가 했다.
그는 처음에는 나를 두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고, 내가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한 지금은 나를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설명한 내 마음이라는 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나를 아는 걸까? 내가 최악의 나와 그나마 최선인 나를 전부 보여주었을 때, 그는 그 조각들로 나를 체계화해서 나에 대해 좀더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혼란에 빠지고 말았나. 그렇게 파편화된 몇 조각을 알면 그 사람을 아는 걸까?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본업에서는 어떤 상황이 와도 더없이 침착했다. 지독하게 방어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어 하나조차 느슨하게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건물의 다른 층에만 가도 갑자기 자기를 하나도 감추지 못했다. 언제 긴장하는지, 누구를 경멸하는지 너무 투명하게 보였다. 그렇게 그를 이런 칸, 저런 칸에 넣어두고 바라보면, 그가 진열해둔 사진 몇 장으로 취향을 짐작해보면, 내가 그를 아는 걸까?
“도대체 그녀는 왜 이토록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여자들은 항상 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지 않았고, 그에게서 자신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사람, 삶 속에서 그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만나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사랑했다.”
-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하지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나? 그 사람 자체가 흘러가고 있는데, 다음 날이면 또 오늘과는 다른 생각과 충동이 피어날 텐데, 다 안다고 자신하는 게 더 위험한 일 아닌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라고 해도, 나는 그 사람이 지닌 무한한 단면 중 내가 그 사람이라고 믿는 일부만 보고 있을 뿐이다.
또, 내가 확인한 단면의 개수가 많을수록 사람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유리하다고 한들, 사람을 ‘좋아하는’ 문제는 다르다. 한 가지 모습만 알더라도 얼마든지 그 하나를 좋아할 수 있다. 나머지 단면에 뭐가 들어있든 상관없을 정도로 내가 본 그 하나가 좋았다. 그가 다른 장소,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이미 아는 모습만으로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김화진의 장편소설 <동경>에는 이런 대사도 나오지 않나. “사실 좋은 사람 별로 필요 없어.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측면이 있어도 상관없어, 당신이 오후 네 시마다 선인장으로 변한다거나 거실에 개구리 삼십 마리를 풀어놓고 키우는 사람이라도 좋아. 당신이 ‘무엇이어도’ 좋아. 그런 마음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보지 못하는 내 모습을 오히려 남이 알아봐줄 때도 있다. 사람에게는 나와 타인을 축으로 하는 사분면이 있어서,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내 모습이 있는가 하면, 나는 모르고 남들만 아는 내 모습도 있다. 나는 내내 그에게, 그는 보지 못하고 내게만 보이는 그의 2사분면을 그려주고 싶었다. 거기서, 오랜 항해 끝에도 여전히 순수를 잃지 않은 소년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정작 그는 그 소년이 자신인 걸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그의 앞에서 내가 좀 무너지더라도.
스무살 무렵 만나던 첫번째 연인은 내게 사랑이란 ‘상대를 온전한 자기자신에게 되돌아가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통해서 비로소 플라톤부터 대중가요까지, 인류가 사랑에 대해 지겹도록 늘어놓은 온갖 이론과 묘사를 전부 이해한다. 물론 그런 이해를 하필 내 곁에 없는 사람을 통해 이룬다는 것은 조금 괴이하고도 쓸쓸한 일이다.
우리는 인간들 중에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만을 온전히 알아볼 수 있다.
-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