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_ 너의 말은 폭우 속 우산 숲이 되어

by 달의 앞면

나는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누가 어디로 이사를 간다고 했던가? 저 친구의 출산예정일이 언제더라? 정보는커녕, 얼굴과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초면이 아닌 사람한테 '처음 뵙겠습니다'를 시전한다. 뭐라고 포장한들, 이렇게 잘 잊어버리는 것은 결국 타인에 대한 다정한 관심이 부족해서다.


그는 누가 무슨 요일에 무슨 일정이 있다고 했는지까지 다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기억해두고서는, 다음 업무일정을 잡을 때 당사자조차도 깜박 잊고 있는 남의 스케줄을 대신 짚어주곤 했다.


그럴 때면 아득하게 아픈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기분 있지 않나, 유난히 예쁜 노을을 보고 있을 때, 곧 져버릴 벚꽃이 눈부시게 피어 있는 길고 긴 도로 앞에 서 있을 때, 환희 속에서 이상하게 가슴이 아픈 거. 너무 아름다워서, 이 순간이 지나가버릴 걸 알아서, 떠나기도 전에 이미 그리운 거.


"너 수요일은 다섯 시까지 가야 되잖아. 그땐 오래 걸릴 거니까 다른 요일이 나을 것 같은데?"


나는 그를 가지고 싶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에 그를 어른으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저런 따뜻한 사람이 어린 나와 눈을 맞추고 괜찮은지 물어봐주고, 내가 수학학원을 무슨 요일에 가는지 따위를 일일이 기억해주고,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어떤 부딪힘들이 전부 내 잘못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거라고 알려주었다면.


그러면 나는 좀더 좋은 사람,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을까. 그런 따뜻한 사람이 '다음에 곧 또 보자.'라고 인사해주면 나는, 그 다음, 또 그 다음까지 수많은 날들을 왠지 안심이 되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살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이 하던 일을 그가 넘겨받아 처리하기 시작하면 단순히 기술적인 능숙함 이상으로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느낌이 들었다. 너무 낯선 느낌이어서, 과연 이게 뭘까 한참 생각해야 했다.


안전함이었다.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안전함. 타인이 내 약한 면을 손에 쥐고 있는데도 전혀 불안하지 않고 온전히 마음이 놓이는 기이한 느낌. 차가운 실력뿐만 아니라 따뜻한 선의까지 가진 사람에 대해서만 느낄 수 있는 전적인 신뢰.


나는 도무지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 인간이다. 좋게 말하면 독립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폐쇄적이다. 그리고 권위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대법관이든 서울대 교수든 그저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딱히 근사해 보이지도 않는다. 회사에서 대표가 불만사항을 말해보라고 하면 이때다 하고 진짜 말해버리는 유형이랄까.


그런 내가 나보다 한참 연상에 그럴 듯한 자리에 있는 그를 동경하듯 좋아한다고 말하면 가까운 사람들은 기겁을 했다.


“어디의 뭐, 라고? 미친, 시작도 하지 마. 그런 사람의 비대한 자아에 네가 맞춰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 ‘우리 오빠 최고!’ 같은 소리를 안 토하고 할 수 있냐?“

“으, ‘오빠’는 엄마 친아들이고, ‘최고’(催告)는 돈 안 갚을 때 독촉하는 거 아님?“

”거봐, 너는 너를 존경하는 연하나 만나야 돼.“

“그 연하도 뇌에 시신경이라는 게 연결돼 있을 텐데 미쳤다고 나를 만나냐… 그리고 나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니라고, 사람을 사랑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왜 그런 데 가서 갑자기 사랑을 하고 있냐고!”


글쎄, 사실 나도 좀 무서웠나. 너무 오래 혼자 싸우듯 사는 것에 지쳤나. 보호자를 가지고 싶었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모든 감정은 양가적이었다.


존경하다 못해 거의 ‘경외’하는데 동시에 너무 안쓰러웠다. 그리워하고 좋아하는데 인간으로서 전문가로서 연구자로서 경쟁심이 들었다. 져주고 싶은데 이기고 싶었다. 안고 싶은데 울리고 싶었다. 잊고 싶은데 평생 기다리고 싶었다. (그리고 맙소사, 보호자라니,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나이 많은 남자와 이어졌을 때는 결국 내가 그쪽의 보호자가 되는 법이다.)


그럼에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키를 쥐고 내 운명을 대신 결정하는 기분, 다정한 사람에게 보호받는 기분이 이제는 썩 나쁘지만은 않더라고. 오래 생각하고 있더라고, 내가, 그 한심한 기분을.


너무 많은 것을 느끼고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나 자신을 내내 나 혼자 들고 있느라 허리가 부러져버릴 것 같았는데, 누가 잠깐 대신 들어준 것 같았던. 마침내 안전하다는 느낌을.




유리조각 같은 말을 해야 할 때면 그는 그것을 그냥 건네지 않고 모서리를 갈아서 투명한 유리구슬로 만들어서 쥐어주었다.


이를 테면, 내가 몹시 예민하게 굴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그도 아는 순간에는 '그만 좀 해라' 대신 이렇게 말했다. "피곤할 땐 볼펜 뚜껑만 잘못 닫혀도 거슬리는 법이니까요."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다'라고 말해야 할 때는 이렇게 말했다. "우연히 그렇게 될 수도 있는데, 보통은 그렇지는 않거든요."


그가 머릿속에서 단어들의 서랍을 휘저어 무해한 단어를 고르고, 시약이 마르기 전에 옮겨 담아야 하는 화학자처럼 재빨리 이렇게 저렇게 이어붙여 가장 상처가 덜 되는 순서를 찾아내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맞은편에 앉은 나한테까지 들리는 듯했다.


에세이스트 브라이언 딜런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구문, 어순, 소리의 차원에서 작용하는 모종의 기교에 미련하다 싶게, 유해하다 싶게 예민하다." 그런 내가 그의 말을 손바닥 위에서 한참을 굴려도 손을 베이지 않았다. 덜 깎여나간 부분이 전혀 없었다. 신기할 만큼.


모두에 대한 그의 다정함을 지켜보면서 그 장소, 그 장면을 넘어서는 뭔가 더 큰 것에 대해 위로를 받았다. 누군가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그 온기보다도, '누군가' 다른 사람들에게 저렇게 다정한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매일같이 너무 많은 싸움과 책략과 욕심 사이에서 살던 내게 보여준, 인간의 다른 가능성.


어쩌면 그는 기억하지도 못할 말들, 매뉴얼처럼, 습관처럼 별 뜻 없이 한 따뜻한 말들이 홀씨처럼 날려와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색색의 우산으로 자란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때, 그가 했던 말들을 꺼내서 풍선 불듯 부풀리면 간밤의 폭우로 넘치는 강이라도 얼마든지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너,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야.' '누구나 그 정도 어긋남은 있는 거야.' '너는 이런 걸 잘 하는구나.' '네가 너를 싫어할 때도 나는 한 번도 너를 싫어한 적이 없어.' '고마워, 정말 힘이 됐어.' '거기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비가 내려도 감기에 걸리지 않고 뛰어다닐 수 있는 총천연색의 우산 숲을 가진 사람이 된다.


열일곱쯤의 내가 그 자리에 와서 그의 말을, 그 말을 해준 마음을, 조약돌처럼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한참을 놓지 못하고 자꾸 만지작거리게 된다. 내내 얼어있던 손이 그제야 녹는다.




맑게 개어 다행스러운 이 밤에 그는 혼란스러웠던 밤들을 떠올렸다. 비행기가 위험에 처했는데도 구조하기가 너무 어려워 보이던 밤들을. … 하지만 로비노에게도,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 작은 빛이 있었다. 그는 가방 깊숙한 곳에서 소중하게 감싼 작은 주머니를 꺼내면서 마음이 무척 온유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더니 마침내 손을 풀며 말했다.


“이건 사하라에서 가져온 거죠…….”


이처럼 용기를 내어 마음을 털어놓자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신비의 문을 열어주는 이 거무스름한 조약돌들에게 제 삶의 환멸과 불행한 애정 생활과 이 모든 잿빛 진실에 대해 위로를 받았다.


- 생텍쥐페리, <야간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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