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직접 만나기도 전에 어쩌다 우연히 그가 친한 사람에게 모든 경계를 내려놓고 하는 말을 들어버렸다. 내가 들어도 될 말이 아니었고, 의도치 않은 사고였다.
"그런 거 무서운데, 나 말고 선배가 하면 안 돼?ㅠㅠ 인생은 비겁하게 살아야지..."
골치 아픈 일은 나도 무섭다고, 누가 좀 대신 해주면 안 되냐고, 안전한 곳에 머물고 싶다고. 농담처럼 뱉었지만 또 진심이기도 할 말들.
그의 말투가 뜻밖에 너무 어린애 같아서 나는 피식 웃었다. 나이와 직업만 봐서는 권위적이고 진지한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선입견과는 너무 달랐다. 그 비전형성이 너무 어색해서 갑자기 남반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꾸밈없이 가벼운 말들이 그의 주위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무지개색 구름 같은 것을 드리웠다. 나는 평소에 그런 알록달록함에 질색하는데, 이상하게 예쁜 색깔이었다.
그 무섭다던 순간이 오자, 그는 옷자락이 펄럭거릴 정도로 서두르면서 나타났다.
왠지 몹시 숨이 차보였다. 서두르는 모양새가 숨이 가빠보인다는 게 아니라, 뭐랄까, 너무 일이 많고 모든 힘을 끌어다 쓰느라 과잉각성된 것 같은 상태. 예전에 어떤 선배가 새벽까지 일하다가 집에 가서 누우면 뇌가 계속 돌아가서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면을 바꿔 쓴 것처럼 다른 얼굴이었다. 무섭다, 도망쳐야지, 하던 사람은 온데간데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자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세상 모든 것에 익숙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깨 너머로 갑자기 코끼리가 나타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처럼. 그 건물이 갑자기 무너지면 모두에게 도망칠 경로를 알려줄 것처럼.
어떻게 저렇게 속마음을 잘 감출까. 저런 게 프로인 건가. 나는 일을 할 때도 저렇게까지 단단해보이지 않겠지. 하지만 저 의연한 모습 뒤에 불안이 있다는 것도 잘 아는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우린 여전히 다 그냥 평온한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어린애들일 뿐이라는 걸 아는데.
역할의 안과 밖에서 그의 모습이 은은한 대조를 이루었다. 사막과 바다, 어둠과 여명이 맞닿아 그리는 경계선의 아스라한 빛깔처럼. 양면적인 것들은 별 수 없이 매력적이다. 문학과 심리학은 끝없이 이런 소재들을 소비해왔다. 야누스, 도플갱어, 그림자, 쌍둥이, 지킬 앤 하이드. 모순은 거짓이 아니다. 하나 안에 하나 이상이 담겨 있는 넓음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입체성이다.
그는 내가 뭘 들었는지 까맣게 모르는 채, 내 앞에서 ‘빈틈없는 전문가’의 표정으로 주어진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내가 이미 잃어버린,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 특유의 반짝거리는 열기를 가지고. 빨랐고, 정확했고, 자기 몫이 아닌 일까지 가져다 했고, 그 와중에 사람들을 배려했다.
그게 좀 웃기면서 귀여우면서 대단해보였다. 감탄과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칼을 빼들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에 긴 밤 같은 두려움과 그에 맞서 일렁이는 새파란 용기가 한 데 깃드는 순간을 엿본 것만 같았다. 성질이 너무 다른 두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일어나자 불꽃이 일면서 다른 물질로 변했다. 마치 연금술처럼. 사랑처럼.
경력이 나보다 훨씬 오래 되었음에도, 그는 아직도 자기 일을 조금은 '재미 있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낚싯배를 팔아버린 노인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푸른 해안선을 내달리는 소년이었다. 그가 맨발로 모래 위를 경쾌하게 딛으면 내 안에서는 새하얗게 파도가 부서졌다. 그의 걸음과 나의 심장박동이 하나둘 규칙적인 리듬으로 엮이기 시작했다.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그의 모든 동작은 먼 객석에서 바라보는 연극배우의 움직임처럼 필요 이상으로 크고 빨랐다. 일부러 신경 써서 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고개를 돌릴 때, 물건을 집어들거나 내려놓을 때, 회전의자의 각도를 조금 돌려 오른편에 놓인 모니터를 향할 때.
그렇게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럴 때마다, 세계의 어떤 비밀스런 구석에서 수많은 원자들, 분자들이 떨리고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모든 동작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아, 왠지 견딜 수 없어.
이렇게 당신이 내 앞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은 대체 뭔가? 당신의 역할에서 나오는 분위기인가. 내가 당신을 통해서 당신이 아닌 다른 무엇을 더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 인격의 어떤 숨겨진 면을 내가 짚어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당신은 만나자마자 내게 우주의 나머지 모든 것과는 다르게 흐르는 중요한 무언가가 되어버린 건가? 보통은 그런 걸 '첫눈에 반했다'라고 하던가?
“잘 되니까 더 욕심이 나네.”
그는 언젠가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린다며, 더 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반짝이는 열기로, 투명하게 기뻐하면서. 아, 또 누가 그런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 표정을.
그런 걸 담아가고 싶었다. 그를 가져가고 싶었다. 그의 역사를 훔쳐 넓은 벽에 내것과 나란히 걸어두고 싶었다. ‘딱 한 사람이라면 정확히 저런 사람이야’라고, 오후 일곱시의 강변북로에 모든 가로등이 한꺼번에 켜지는 순간처럼, 비스듬한 느낌표를 붙여 생각했다.
<빨간머리 앤>에서 길버트가 뭐랬더라. 그걸 지금의 서울에서 그대로 살아내는 사람이 있다니, 무슨 소년만화도 아니고, 그 말을 누가 믿겠어?
“누군가 인간은 투쟁의 동물이라고 정의 내린 사람이 있었지? 나는 질병과 고통과 무지에 도전하겠어. 이 세 가지는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어. 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몫을 힘이 닿는 데까지 훌륭하게 해내고 싶어.”
- 루시 모드 몽고메리, <그린게이블즈의 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