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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빛나 Oct 14. 2022

보고서, 회사원이 빚어낸 작품

텔레비전에 나오는 스타들은 그들의 활동 자체가 작품이 된다. 가수가 부른 노래, 배우가 열연한 드라마, 희극인이 출연한 예능. 술가 활동은 또 어떤가.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쓰거나 영화를 찍거나. 그들의 산출물에는 작품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 작품은 무대에서 또는 전시와 판매 공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작품. 창작 활동으로 얻어지는 제작물.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창작 활동의 결과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거리. 작품과 회사원의 거리는 딱 그만큼의 거리일까. 멀리 있는 그 단어를 갖다 붙여본다. 회사원의 직업 활동 산출물에도 작품이라는 말을 붙여본다. 상사에게 올리는 보고서, 부서원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 협업의 대화로 이뤄가는 프로젝트의 진전. 매일 무대에서 회사원은, 회사의 사업이 돌아갈 각본을 쓰는 작가이자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하는 배우가 된다.


만약 회사원인 당신이 보고서를 썼다면, 그 보고서는 작품이라고 불러주고 싶다. 그래. 보고서는, 당신의 손 끝에서 탄생하는 작품이다.


회사에서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한 선배는, 내가 쓴 보고서 초안을 늘 꼼꼼히 검토했다. 지시를 받아 쓴 초안을 프린트해서 선배 자리로 가면, 선배는 빨간펜을 들었다. 그 펜으로 빨간 밑줄치고 취소선을 긋고 새로운 단어를 붙여 썼다. 이건 이 표현이 어울리지, 이 단어가 맞니? 이건 순서를 바꾸고 여기는 삭제하는게 좋겠다. 그러면 나는 그 첨삭된 버전을 가지고 다시 내 자리로 와서, 빨간 지시사항대로 고치고 바꾸고 다듬은 수정본을 만들어 선배에게 가져갔다. 그러면 선배는 또 다시 빨간펜을 들었다. 내가 썼던 보고서가 그대로 윗선에 보이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이크로 매니징이라고 할 법한 그 터치는 후배 사원인 나를 꾹꾹 내리누르는 중압감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잘 쓴 보고서는 이런 모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경험이었다.


잘 쓴 보고서.

초안 작성, 검토, 첨삭, 퇴고. 읽는 이의 눈높이에 맞춘 단어 선정과, 읽는 이의 이해를 돕는 맥락 표현. 단어와 순서와 구조를 매만지는 섬세함. 보고하는 자가 보고받는 자로 하여금 의도한 방향의 의사결정을 끌어낼 수 있게끔, 회사의 절제된 언어로 풀어가는 스토리텔링. 보고받는 자가 보고서에 쓰인 글을 매끄럽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자간, 들여 쓰기, 문단 간격과 글머리 기호의 위상을 조정하는 심미적인 수정. 그리고 이 과정을 반복 또 반복. 보고서 한 장을 쓴다는 것은 이토록 수고롭고 섬세한 일이다. 작품을 빚어내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상사에게 의사결정을 바라는 보고서를 쓰고 그 보고를 잘 마치고 나면, 우리팀은 우리가 원했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상사에게 현황을 공유하는 보고서를 쓰고 그 보고를 잘 마치고 나면, 우리팀은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상태 체크 방향에 대한 의견을 얻을 수 있었다.


회사의 한 부품으로써 회사의 사업을 어떻게 굴려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큰 시야의 부품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의사결정을 하게 하는 것. 그것이 보고서를 쓴다는 것의 의미다. 잘 쓴 보고서는 회사원의 예술.


당신이 사무실 자리에서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며 빚어낸 그 글 뭉치 한 부는 절대로 세상에 널리 읽히지는 않는다. 세간의 찬사를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잘 쓴 보고서의 가치를 회사원은 안다. 당신은 안다. 보고받는 자가 당신의 보고서를 눈으로 훑는다. 당신은 주요 사항을 임팩트 있고 간결하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핵심에서 벗어난 세부 사항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면, 당신은 보고서 맨 뒤쪽의 별첨을 내민다. 보고받는 자의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프로젝트의 진행 방향이 설정된다.


당신의 보고서는, 작품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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