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데서 얻는 행복

세상은 사람 수만큼 아름답다

by 쓴쓴
어릴 적에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다를 때면 엄마한테,
"왜요?"라고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대충 한마디로 정리하면서 화를 냈다. 그건 나빠, 못된 짓이야, 라며 엄마는 슬퍼했던 것 같다. 아빠한테 말한 적도 있다. 아빠는 그냥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나중에 엄마한테 '삐딱한 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자이 오사무, <사양>, '여학생', p.33)


좁은 연립주택 사이, 어린아이들의 작은 놀이터에 선행학습이란 광풍이 불기 시작하던 때다. 이 바람은 공부에 취미 따위 없고 성적에 관심조차 없었던 초등학생들에게 불어닥쳐, 우후죽순 생긴 '속셈학원'이라는 것에 등록하게 했다. 방과 후 학원에 남아 공부하는 게 학생의 미덕이 되던 시기였다. 그러니 아마도 주변 사람들은 새 풍속도를 정면으로 거부했던 필자를 돌연변이처럼 보았을 것이다.


부모님은 '삐딱한' 조금 받아들여 주셨다. '왜' 내게 학원이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의견을 들으시고는 다니던 학원을 세 달만에 그만두게 하셨으므로. 대신 타협안으로 수영 학원을 다녀야만 했다. 그 후 나는 두 가지를 확인하게 된다. '난 운동을 정말 싫어하는 데다 못한다'는 사실과 부모님도 자식을 잘 모르신다는 것. 결국 수영 학원은 다닌 지 한 달 조금 넘어서 그만두게 된다.


불행하게도 당시 아이들의 미래와 행복을 위한 권장항목엔 스포츠만 적혀있지 않았다. 미술, 음악 학원이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각 학년의 방과 후 시간에 맞춰 동네를 뱅글뱅글 돌았으므로.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미술은 낙제였다. 붓질에 소질이 없을뿐더러 대략 그려야 한다는 스케치는 꼼꼼하게 그려내야 직성이 풀리는 저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에 세부적인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자아성찰은 충분히 되었던 것 같다.



앞서 인용했던 <사양>의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는 백 년 전 일본에서 '여학생'이라는 짧은 이야기로 청소년기를 보내는 인간의 내면을 묘사했다. 이 학생은 어른들이 부리는 가식을 경멸하면서도 어른으로 대접받고 싶은 서툰 반항심을 지녔다. 당시 사회윤리가 허용한 여학생의 모습에 동참하면서 동시에 거부하는 복잡한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의식의 흐름으로 진행되는 단편이어서 뚜렷한 기승전결은 없지만 인상 깊은 성장소설로 읽었던 까닭은 화자가 보여준 태도 덕분일 것이다. '나다움'을 정의하는 기준이 끊임없이 바뀌는 불안한 상황에도 여전히 '나'이고 싶은 주인공에게 공감을 느꼈으니 말이다. 강요받는 정체성을 거부하는 태도, 끊임없이 샘솟는 궁금증으로 주변을 괴롭히던였으니 시대, 국적, 환경, 성별까지 다른 가상의 인물에게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장하며, 그녀가 그랬듯이도 이내 자신을 숨겨야만 했다.


점점 커가면서 나는 무서워 벌벌 떠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양장 한벌 짓는 일에도 남의 이목을 신경 쓰게 되었다. 사실 자신의 개성 같은 것을 몰래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고 싶지만, 그것을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체현하는 건 두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착하게 여기는 딸이 되고 싶다고 늘 생각한다. (중략) 정말 맘에 들지 않는다. 도덕적 기준이 확 바뀌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런 비굴함도 없을 테고, 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좋은 평판을 받기 위해 매일매일 힘들게 사는 일도 없을 테지.

(다자이 오사무, <사양>, '여학생', p.33)


(한국에서도 일본 못지않게 자신의 개성을 남들 앞에 드러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다. 운동을 못한다거나 운동에 취미가 없다는 것, 미술보다는 음악을 더 사랑한다는 고백은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인정받지 못다. 왜냐하면 성격을 파악하는 과정은 간혹 튀는 인물을 거르는 기계적인 순간들로 엮인, 빠르게 지나치는 공정인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사람은 성장하며 얻은 자의식 덕분에 타인과 자신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타인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더 뚜렷하게 보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발견한 차이를 넘어 상대를 인정할지 여부는 시대와 문화, 그리고 교육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야생과 문명 사이에 놓인 사람의 역사에서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폭력의 불길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로를 인간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기에 피차 용납하려는 마음들의 이야기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겠다.)


동시에 우리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떠한 보편성, 다시 말해 타인과 나를 '같은 존재'로 묶어내는 방법도 본능으로 아는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하면 '어떻게 사람이 그래'라며 지탄을 가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어'라고 공감하듯이 말이다. 상대가 보여준 뛰어난 능력보다 자연스레 드러내는 부족한 모습에 '나와 같다'는 동질감을 느다. 타인이 극복하지 못한 삶의 과정을 온몸으로 이해하면서 자신과 동일한 '인간'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상대의 결핍과 한계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공감능력 덕분에 만약, 우리가 인간이라는 범주를 설정할 수 있다면 우린 서로의 나약함에 더욱 관대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차마 이해 못할 깊은 심연의 것일지라도 타인이 마주한 한계, 마주한 어둠에 유대감을 느끼고 인간애를 발휘하기도 하니 말이다. 자신의 깊은 슬픔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다른 이를 위로할 수 있다는 말도 그런 이유에서 나왔을 것이다.



고우나 미우나 타인의 존재는 '유일한 나'를 정의하면서 '아주 많이 다른 너와 나'가 함께할 실마리도 던져주는 듯해 보인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람들의 말을 듣다 보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저마다 인생에 대해 꿈꾸었던 소망을 깨진 채로 간직하고 있으니. 간절한 소망을 흔쾌히 보듬어주지 못하는 나의 인생이 너에게도 있어서 당황스럽다는, '작은 유대감'을 공유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낯선만큼이나 어색할 정도로 서툰 통찰을 얻곤 다. 인생은 마치 한 입에 넣을 수 없는 팍팍한 빵과 같다는 느낌, 그런데도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소화시키도록 강요당하는 것 같은 불쾌함, 같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 귓가에는 생각보다 사람의 이야기가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느긋한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지만 타인의 것만큼 자신의 이야기도 허용하지 않는다. 인문학이 아니라 직접 대화를 나누고 겪어봐야만 아는 사람, 이 존재 자체에 무관심한 현상은 어쩌면 '인생'을 생각보다 무가치하게 보고 있기에 나타났는지도 모다. 어느 때보다 더욱 지구라는 행성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세상이 분명한데도 세계를 관찰하는 우리는 자신들과 같은 종에게 관심을 쏟지 못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아름다. 그러기에 세상에 깃든 아름다움을 알아채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다. 그러니 차라리 누군가의 지혜, 처세술 같은 당장의 비기를 바라는 것이겠다. 다양한 마음들로 채워진 세상, 타인의 다름을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부터 받아들이기 어려우므로. 결국 고성이 오가는 논쟁의 식탁에서 심야의 일기장에 적힌 부끄러운 기록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내뱉는 생각의 중심과 근거는 '사람'다. 여러 논의들이 오가는 테이블을 오래 지켜보면 사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는 밑바닥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사람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라는 진지한 물음에서 파생된 싸움은 고상할 수가 없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는 곧 자신을 인정해주지 못한다는 신호이기도 하니 말이다. '왜 이것이 나답게 해주는지, 왜 이것 때문에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지'는 경제적인 조건이나 당위성으로 풀어내기 어려운 주제다. 같이 살면서도 누군가는 꽃을 키우는 일이 행복하고 누군가는 손에 흙이 묻는 것조차 싫어한다. 없애버리고 싶은 것을 자신의 행복이라고 고백하는 셈이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무심한 눈으로 보면 세상엔 쓸데없는 게 너무 많다. 하늘을 채운 별, 대지의 풀과 나무, 봄바람에 날리는 꽃가루, 여름의 긴 장마, 멀리 돌아가는 노선, 가로수로 심긴 은행나무, 무릎까지 오는 긴 장화 등 이 외에 너무 많다. 이 중에 몇 개만 그렇지 다 그렇진 않다고 말하려는가? 아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떠하다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존재한다. 사람이 의미를 부여하기에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이유로 어떠한 대상이 지닌 의미를 판단하기란 너무 섣부른 행동이다.


물리 천문학자는 별의 탄생과 죽음이 우주와 지구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느낄 것이다. 봄바람의 꽃가루를 보고 생물학자는 생태계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시인은 별과 풀을 보고 사람과 인생이 담긴 아름다운 작품을 쓸 것이다. 그리고 꽃가루만 있으면 재채기하는 누군가는 공기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여름을 좋아할 수도 있겠다.



사람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다. 우리가 나와 세상,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게 된 이후 마음이 가는 것들마다 남이 모르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선택인지 고민하여 가치관을 정하고 세상을 정의하고 그것에 부여한 의미를 믿음으로써 세계관을 형성다. 그리고 이것들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순환이 일으키면서 동일한 인간이지만 타인과 다른 유일한 나를 끊임없이 재창조시킨다.


그렇기에 행복은 개인의 세세한 부분을 인정하고 지켜가는데서 시작다. 억지로 차이를 만들어낼 필요는 없지만 '나답다'는 개념은 사실상 공통점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상대의 행복을 인정하는 일도 그렇다.

부차적인 물건이라 생각했는데 '너'는 계속 중요한 것이라 주장할 때, 자신과 다른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해할 수 있었던 '너'가 결핍투성이로 보다. 이제야 마주한 상대방의 집착은 나와 공유하는 공통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연대감을 지워내버린 상대방의 진면모, 내게 없던 부족함이 막을 열고 등장한다.


과연 이렇게 다른 '너와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걸까?라는 질문은, 이런 차이에도 우리의 행복을 지킬 수 있겠냐는 말과 같다. 필자는 만약 상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할 수 있다면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 때문에 행복해하는지 알아야겠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서로를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눠질테고. 그러니 정말 불행한 것은 함께 행복하기 위해 내 행복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타협의 현실이 아니라 언제 내가 행복한지를 모르기에 상대에게 넉넉할 이유를 찾지 못한 마음일 것이다.



어느 날 내면의 목소리가 너는 왜 살아,라고 물길래 조금 고민하다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살지,라고 흔쾌히 답했다. 연이어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질문에 앞으로도 계속 답할 수 있을까'. 그러자면 나를 애써 감추고 숨기는 일은 그만해야겠다 생각했다. 남들 눈에 보일 나에게는모없다고 멸시했던 것부터, 함께 행복하기 위해 차근차근 아마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