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일 대로 꼬인 후에
사람은 편견을 갖는다. 좋은 사례는 나에게, 나쁜 사례는 나만 빼고 생각한다. 좋은 결과는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나쁜 결과는 너의 삶에 관여한 내가 옳았음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는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들이 일어난다. 다른 이들에게만 일어날 것만 같던 일들이 곧 내게 일어났음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인정해야 보인다. 그래야 자신을 하찮게 보고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거나 남의 불행에 안심하는 무례하고도 염치 없는 자기기만적인 삶을 그만둘 수 있다.
간단하지 않은 인생이다. 인생에서 간단한 것은 '인생은 간단하지 않다'는 말뿐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쌓은 조악한 전개, '삶의 논리'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보고 있는 세상의 일부다.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일부이자 세상을 그대로, 자신을 한 사람의 모습 그대로 보려는 시도의 일부분이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다. 일부가 이러하니 전체의 모습은 어떠할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 세상에 원인을 만들어 내는 두 주체가 있다면, 신과 생물일 것이다(무신론자에게는 하나겠다. 혹은 여러가지일 수도 있겠다). 그중 사람은 신보다 앎과 능력 그리고 책임에 있어서 제한이 있다. 지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있다. 그것이 신과 사람 사이에 있는 분명한 간극, 그 이상의 뛰어넘을 수 없는 골짜기이다.
신은 그럼에도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한다. 원인을 만드는 주체로 세웠다. 그 원인을 쥔 존재가 결핍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일부로 결핍이 '존재' 하는 존재를 격상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뒤덮은 수많은 생명 중에서 유일하게 드높은 선과 아름다움과 의를 추구하도록, 목적이 신의 고상함을 닮아가도록, 그 기준이 신의 마음에 있는 의지를 쫓도록 지정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신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살피는가 보다. 또한 사람의 정체를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도.
그러니 웃음인지 울음인지 입으로 터져나올 때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지만, 내가 할 일은 선택지를 잘 추스리고 골라내어 가능성 있는 일을 해보는 것뿐이다.
'성서'의 신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죄의 기준을 두었다. 이는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자신을 알려주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자신을 닮은 자로 자신의 마음을 아는 존재로, 세상의 무엇도 거룩과 죄를 구분해 알지 못하지만 인간인 너만은 자신 앞에서 아름다움을 알고 행복하라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신은 큰 희생을 했다. 시작점을 찍은 후부터 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드높은 기준을 부여한 순간, 이미 인간은 기준선을 넘나들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결국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고 부정해야만 하는 용납이라는 사건을 사람이 만들어낼 것을 알았을테니 말이다.
아무튼 신은 그렇다고 한다. 그럼 사람은 감히 무엇을 해야하나. 완전하진 않지만 번듯하게 차려진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택해야 할까. 나는 행복을 택하겠다. 이 세상에 타의로 태어났으므로 자의로는 행복을 택할테다.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행복을 지목하여 추적하겠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같던 일들이 꼭 불행하리라는 법만 있을까. 간단하지 않은 인생인 만큼 아주 제대로 꼬여서 결국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사실 그러리라고 나는 믿을 뿐이다. 결핍이 있는 만큼 믿고, 믿는 만큼 행복을 찾아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내가 지닌 자유로 충분하진 않지만 소소한 즐거움 만큼은 지을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