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는 명령

지우개의 세상에서

by 쓴쓴

기억하기론 난 칭찬을 자주 하던 아이였다. 표현이 없던 아이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지금의 성인기와는 달리.


미술 시간에 그린 또래의 그림을 환상적이라며 칭찬하던 내가, 소풍을 가서 함께 나눠먹던 짝꿍의 도시락이 너무 맛있다며 칭찬하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말에 놀라던 어른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남발하던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난 미술을 정말 못했고, 남들 다 먹는다는 흔한 햄조차 우리 집에선 건강상의 이유로 반찬 후보에서 탈락하곤 했다. 정말 부러워서, 실제로 너무 놀라워서, 세상에 감탄하는 유아기의 아이처럼 타인에게 관심을 쏟았던 나였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처음부터 살아온 게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의 모습은 여러 선택지 중에 여태 지워지지 않은, 남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스스로 질문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나는 왜 '나'일까?


내 기억이 맞다면, 표현이 좀 과격하지만 본격적으로 입을 닫았던 시기는 아마도 그때일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일 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귀었던 친구가 자살을 했다.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초등학교 때 겪었던 왕따라는 경험이 채 아물기도 전에, 풍성했을 나의 인격은 해변의 모래가 파도에 휩쓸리듯이 지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의 이름,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기자들이 학교를 찾아와 학생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던 것도 선생님들이 교문 앞에 서서 기자들을 막는 모습도 기억난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학교의 어설픈 애도, 아니 방침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이내 잊혔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잊힌다는 냉혹한 현실이 무서웠다. 스스로 혼자가 된 나는 마음을 열지 않기로, 사람을 믿지 않기로, 무조건 의심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입과 마음은 그렇게 닫혔다. 그리고 지워지기로 했다. 나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 너무 튀지 않고 흐르는 대로 살다가 사라지려 했다. 지금 당장 죽을 수 없다면, 자연사를 기다려야 한다면 사람 쉽게 지워버리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유일하다고 믿었다.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진.


세월호. 그것은 나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다.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뉴스 속보를 보며 한 달을 내리 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슬펐고 세상의 흉폭한 '지우개'에 두려웠다.


그제야 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살아온 것이 아니라, 이 나라에서 살아남았다는 자각은 슬픔을 넘어 분노로 이어졌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문학에서 뉴스에서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지우개라는 관념이 떠오른 건 몇 달 전쯤이다. 이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쓰고 싶어 졌다. 지워지는 존재들에 관하여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선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를 보며 다시 울었다. 나의 트라우마 때문만이 아니었다. 숨겨진 사람들을 쉬이 찾아낼 수 있다 여긴 본인의 자만이 부끄러워 서였다.


하지만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엔 지워지는 존재들이 있다. 존재하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들이 있다. 사실 무엇을 쓸 수 있을지, 언제 써 내려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는 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나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오늘도 글을 남겨본다. 그리고 나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