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어디로 가는가

쿼바디스 도미네

by 쓴쓴

관계는 원래 용이하지 않다. 실용적 부산물을 기대할 대상이 아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관계를 시작하고 지속하지만, 기대감은 원동력 중의 하나이고 관계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 실은 관계 그 자체로도 이미 빛이 난다고 나는 본다.


실용주의는 무자비하게 혼란스러운 한국의 근대를 훑었다. 그리고는 무한 경쟁으로 점철된 사회를 마침내 구축하고 사람의 관계에서도 자연스럽게 '쓸 만한가' 를 따지게 만들었다.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에 대한 기준에 실용성도 추가된다.


이전 시대와 달리 현대사회에선 분명 람을 소유할 수 없다. 자명한 사실이다. 사람도 그러하니 관계 또한 그렇다. 이것은 물을 손으로 잡아보려는 시도와 같아서, 감정도 마음도 내 뜻대로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도리어 그렇다고 속이며 사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내야만 성공을 얻는다고 말한다.


굳이 경제적인 부분을 건드려보면 실용성을 판단하는 큰 기준, 즉 '돈이 되는 것인가?' 에 대한 답으로, 결코 물건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을 쉽게 사고 판다. 그러니 반대로 버리는 일 또한 쉽게 일어난다. 이것이 안 되면 을이고 가능하면 갑이 되는 걸까.


'갑' 은 관계를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휘두르고, 덜 실용적인, 실용성을 소유하지 못한 을은 인정받는 관계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한다(혹은 분노의 이유가 관계의 주도권일 수도 있겠다). '갑' 은 관계를 사고 파는 물질로 바꾸고 을은 결핍된 관계에 몸부림을 친다.


아무튼 그래서 어렵다. 거창하게 썼지만 사람이 참 어렵고, 사람답게 사는 게 어렵다. 진실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다. 톨스토이를 읽어야 하나 싶다. 그는 사랑이라 답했으나, 사랑은 개인에게 머물러 있으면 소용이 없다. 움직이는 동사가 되어야 의미가 있으므로, 이 시대에 친구를 얻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신의 아들이 그의 제자들을 친구라고, 구경꾼들을 향해 형제자매라 부를 때 인간들이 그를 부르는 말은 쿼바디스 도미네 정도였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수제자 베드로가 반대자들을 피해 도망치다, 환상으로 나타난, 십자가를 진 예수에게 물었던 질문이라 한다. 예수는 그의 반대자들이 살던 성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아, 너무 자명하다.


어디로 가십니까. 묻기는 하지만 글쎄, 당신에게 다가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내 갈 길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만. 친구여, 왜 하필 그 길을 택했습니까. 사람이 사람 대접을 받는 곳으로 돌아갑시다. 아니, 찾아봅시다. 그곳으로 가지 말고, 나랑 같이 도망칩시다.


그러니 나는 소망한다. 나 혼자 도망치지도 않고, 그를 외면하지도 않기를. 차라리 그를 껴안고 십자가를 발로 차고 같이 도망치기를 바란다. 우리끼리라도 서로 사랑해주며 살자고, 서로를 채워주면서 살자고.


그러나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 아니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어디서 솟아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