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이렇게 시작하는 문장은 대부분 급히 떠오른 생각을 옮겨 적을 때 나타나는, 본인의 버릇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다시 말해 그 존재에 대한 여러 가지 서술은 결국 인간의 경험이다.
그것이 계시가 되었든 아니든, 그 자체가 신의 개입이든 아니든, 인간의 환각이든 아니든, 심지어 신의 존재 유무까지 나아간들, 인간의 경험이 기술된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신앙은 굉장히 개인적으로 머물러야 할 특징을 지니지만 공공의 장으로 뻗어나갈 속성도 가진다. 왜냐하면 '나'의 신이 나'만'의 신일 거라는 생각은 너무도 편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18.05.10)
신은 공공의 존재로 도약한다. 아니 도약해야만 마침내 존재한다. 개인의 체험이 공유되지 않는다면 신은 그저 마음의 창에 비추는 머릿속 영화일 뿐이다. 그것이 입으로 발화되고 오감을 충족시켜 실제 세상에 나타나야만 신이 드러난다.
신은 끊임없이 요청되고 있다. 인류는 신의 의자가 비어있음을 보았고 드넓은 우주에 가득 찬 무의미에서 삶의 부조리함을 깨달았지만 무신론에 온전히 자신을 넘기지 않는다.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하여 이름을 붙이고 숨어든 혹은 숨겨진 신을 찾아내 인생의 도를 따라 여행한다.
그런 도상의 존재들이 만나 자신이 경험한 신을 공유할 때 이 세상에 신이 출현한다. 그들은 서로 힘을 겨루고 싸우기도 하다가 동맹을 맺기도 한다. 각자의 그림자처럼 자리하던 저마다의 신이 공유되고 일컬어져서 인간을 비추는 빛이 된다.
그러므로 신을 생각하는 인간은 자신이 신 존재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은 절대적인 만큼 유하기에 인간의 결정을 따라 나타난다. 또한 신을 다른 이와 나누고자 한다면 독점과 독선을 주의해야 한다. 신은 특정한 개인에게 머물러있지 않으면서 특정한 의지를 따라 움직이지도 않는다. 비어있는 의자를 선점하려 한다거나 무엇으로 채우려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가짜임이 분명하지만 사람은 쉽게 속는다.
얼굴에 쏘아진 빛은 눈을 어둡게 한다. 그러니 얻은 빛이 있다면 그것을 바라보기보다 그것이 바라보게 하는 곳을 보는 게 좋다. 그래서 우선 자신이 걷는 길을 밝게 하면 된다. 때론 도움을 얻으려다 너무 밝아 눈이 멀 것 같은 빛을 보는데 살짝 벗어나는 방법으로 조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도우려 한다면 함부로 면전에서 신을 요청하기보다 나란히 서서 어디를 비추어야 할지 둘러보는 게 훨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