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 초코의 민트를 좋아하고 녹차 맛이 들어가면 군말 않고 사 먹어보며 자몽의 조화로운 단(쓴) 맛을 사랑하는 나는 식탁 앞에선 특이한 사람이다. 읽는 행위보다 책을 더 사랑해서 소유하기를 즐겨하고 남겨진 글들과 쓰이는 문장에 감탄하는 나는 지인들 사이에서 예외적인 인물이다.
소수가 공유하는 취향이라서, 특이한 개인의 식습관이나 취미 때문에 삶의 기반이 흔들렸거나 목숨에 위협을 느꼈던 적은 다행히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본인은 운이 좋다. '나'를 이루는 여러 면모를 방해받지 않고 누리는 면에서도 그렇다.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들은 요즘 태평양 너머의 나라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혐오에 대한 반대 시위를 보도했다. 시위대는 타고난 피부색 때문에 죽어야 했던 이를 위해 저항했고 분노를 거리에 쏟아부었다. 코로나도 이들의 행진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공권력을 향한 시민 불복종은 경찰의 자발적인 시위 협력까지 이끌어냈다.
본인은 이처럼 존재 방식에 수정 혹은 삭제를 가할 정도의 외부 압력을 아직까지는 받아본 적 없다. 청소년기와 성인 초기를 거치며 겪는, 또래 문화의 사회화 과정은 번외로 두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이 현실이 나에게는 매우 좋은 상황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바닥에 기도가 눌린 채 죽어가던 그 시민은 '숨을 쉴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작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힘없이 구조 신호를 보냈던 이 영혼은 어쩌면 나처럼 자몽을, 책이나 글을, 민트를 좋아했을 수도 있다.
식습관이나 취미 따위가 죽음을 불러온 차별, 외면당한 공동체원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삶을 채우는 다채로운 의미들이 각 영혼의 취향 속에 내재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어떨까. 나와 동일한 것을 사랑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상상한다면, 타고난 것을 핑계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덜하지 않을까.
이런 와중에 지급되는 국가재난지원금에 관하여 청와대에 청원 글이 올라왔다. 노숙자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이는 인권을 보장하라는 말과 다를 수 없었다. 노숙자 또한 코로나를 통과하는,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그러니 모순이 여기에 있다. 타고난 것을 근거로 삶의 다양한 경치를 얻을 기회와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이 모두를 '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