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분류될 책으로 남으려
책상을 정리한다. 깨끗이 치우고 나니 이만큼 정돈을 잘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절로 나온다.
좀 기분이 좋은 날에는 방 청소로 이어간다. 책꽂이에 눈길이 꽂힌다. 책 틈에 쌓여있던 먼지를 털어내다 형광등 빛에 반짝이는 지나칠 수 없는 한 묶음을 본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시간은 대단치 않지만 충분히 즐겁다. 사진마다 십중팔구 인상을 찌푸린 얼굴을 보거나 '오늘 하루 재미있었다'는 문장으로 끝난 일기를 읽는 묘미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생활 통지표를 발견한 당혹스러운 기쁨과는 비길 수 없다.
기록된 '나'는 마치 특별한 존재인 것 같다. 특기란에서 귀여운 허풍에 웃고 옆에 나란히 붙은 취미 칸에서는 당혹스럽다. 이를테면 '독서'와 같은 단어 덕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어린이는 취미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일생을 그려보는 첫 단어 중 하나를 쉽사리 결정해놓았으니 말이다.
빈칸을 당당히 차지한 단어들은 한 인생을 칠할 물감이 될 후보에 오른다. 독서와 같은 흔한 취미에 그럴 만한 중압감이라는 게 있을까 싶지만 삶을 규정할 시작점으로는 손색이 없다. 세상을 구성하는 작은 구성품 중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고르는 과정인 까닭이기에 그렇다.
돌잡이는 아마도 첫걸음과도 같은, 그런 종류의 과정일 것이다. 부모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이고 지켜보는 이에게는 단순한 재미, 그 이상도 아닌 순간의 오락일 수 있지만 잠깐만 조금 진지해져 보기로 했다.
상 위에 펼쳐놓은 물건으로 한 인생의 정체를 점쳐보는 일은 돌을 맞이한 아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별로 없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부터 억지다. 아이를 보는 사람의 마음에 기대감을 심어주려는 행위일 뿐이지 아이의 인생에 대한 기대감은 단지 타인의 시선이다. 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집어 들어야만 할 아이의 생경한 시선은 배제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 생명 역시 자신을 정의하는 수많은 시선을 솎아내며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려는 용기를 내야만 했다.
(너무 무거워진 것 같아서 빠르게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오기로 한다.) 그런데 왜 그때의 취미는 - 흔할 수 없지만 흔해져 버린 - 독서나 음악 감상으로 줄곧 통일되었을까. 실제로 독서를 즐겨했던 필자도 옆 짝꿍도, 앞에 앉았던 아이도 자신이 쓰고 싶지 않은 독서로 취미란을 채웠던 이상한 기억을 더듬게 된다. 취미가 무슨 말이냐고 묻던 같은 반 친구에게 독서나 음악 감상이 좋을 거라고 답해주시던 담임선생님의 말도 떠오른다.
취미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그 의미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고급하다고 '여기시는' 정해진 취미의 항목들 중에서 비슷한 것을 적어내고 남겨두어야만 했을까.
좀 더 쉽게 바꿔보자. 관심사 정도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자주 눈길이 가는 무언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행위. 이 정도로 정의를 내리자 왜 선생님께서 더 좋은 취미를 선택하도록 추천하셨는지 알 것도 같다. 공부를 잘하거나 특기를 기르기에 방해되는 즐거운 일은 취미가 아니라 딴짓이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재밌게도 한참 자란 우리는 여전히 함부로 공감을 요구 못 할 본인만의 관심사를 지녔다고 조심히 인정한다. 그러기에 딴짓을 권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어린 자신이 차라리 불쌍하다.
다시 방 청소를 하던 그 장소로 돌아가 본다. 앨범을 덮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먼지를 닦고 소중히 책장에 다시 꽂는다. 그리고 잠시 스쳐가는 생각이 있다. '난 진짜로 뭘 좋아했더라...'
앞에서 밝혔듯이 필자는 독서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읽는 행위보다 책을 조금 더 좋아해서 읽고 싶은 분야의 책을 두고두고 쌓아둔다. 그렇게 책상에 둔 책을 보면 행복하고 왜인지 모르게 든든하다. 이것이 함부로 공감을 요구하지 못할 나만의 취미였다.
요즘처럼 취미가 다양해지기 전까지는 잘난 체 하려 한다고 종종 오해를 받았다. 따분한 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를 경멸하는 눈빛도 자주 받았다. (이제는 취미도 남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값어치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도록 잘 선택해서 만들어 낸다고 한다. 비교해보았을 때 타인에게 더 각인이 될 만한 것으로 고르려는 전략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더 이상 취미라고 부를 수 없고 특기라고 하기에도 뭐한, 적절히 연마된 가공품일 뿐이다.)
책을 나름의 분류대로 한 권씩 뽑아 다시 꽂기를 반복하면서 생각해보아도, 딱히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추측해보건대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본인의 특이한 몰두가 여러 답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책은 사람이 쓴다. 그러기에 만약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는 인간을 공부하는 존재다. 사람이 무엇을 쓰든 그것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이 본, 사람이 들은, 사람이 느낀, 사람이 판단한.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라는 다른 이의 수영장에서 헤엄쳐 볼 수 있다.
물론 작가의 시선은 최소한 자신의 시야만큼 한정되어 있겠지만 우리는 자신만의 것을 창조하기에 앞서 모방하는 존재이기에 독서는 가치 있는 일이 된다. 작가와 같이 먼저 세계를 구축한 이들에게 동감하거나 반대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국에서처럼 쉽게 자신을 표현하거나 의견을 내보이기 어려운 사회 속에서 독서는, 오랜 기간 숙고한 깊은 고민을 나누려는 이들에게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상대를 부정하여 자신을 경험하고 발견하며 '나'로 살아갈 용기를 잃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바란다. 이 바람은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라는 부추김이 아니다. 단순히 부정 그 자체로, 나와 다른 존재가 내뿜는 모든 것과 그의 그림자마저도 나의 것과 같지 않다고 인정하라는 권면이다. 자기규정의 여정을 언제나 시작하고 절대 마치지 말라는 경고이자 격려와 같다.
때로가 아닌 너무 자주, 외쳐도 돌아오는 메아리조차도 없어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초라해 보여도 여전한 저자들의 순수함에 놀란다. 부러웠다고 해야 할까. 타인을 부정하고 자신을 찾았더니 차이를 인정하고 공감을 얻어냈던 걸까. 그래서 부러움이 질투가 되지 않고 질투가 날 속이지 않게 하려고 그들처럼 글로 나를 표현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삶은 운명이다.' 이 명제를 무작정, 무비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자연스레 동참한다. 필자가 겨우 할 수 있는 소극적인 반항으로, 주변인들의 무책임한 질문에서 최근에 불거진 블랙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옥죄는 자기검열의 늪에 쉽사리 빠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글쓰기로 고수하고 싶다.
소극적인 가슴속 아득한 쓰린 것이 소화되지 않은 날의 트림처럼 올라온다. 규정하는 자, 그들만의 세계를 지키고자 그들의 '고급한 사람'을 규정하고 '나'의 영역을 깨부수는 이 작위적이고 지나친 상관. 이것이 사회가 어떻게 되든 각 개인에게도 맡겨진 풀어야 할 매듭 같은 것이라는 사실에 긴장하게 된다.
말끔해진 방을 천천히 둘러본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정리했더니 새롭게 보이는 만큼 마음도 새로워진다. 이런 신선한 분위기 속에서 매 번 느끼는 익숙한 광경은 형형색색의 책이 그려낸 책꽂이다. 정리할 따마다 달라지는 분류체계 덕분에 다르게 배열된 색깔은 마냥 새롭지만은 않은 익숙함을 담아내기에 마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이어주는 자의식과 같다 여겼다.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것은 뭘까 싶다. 자신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참을 멍하니 무지개처럼 펼쳐진 책장을 바라보다가 삶이 책이라면, 영영히 미 분류된 책으로 남겨지고 싶어 졌다. 도서관에 꽂혀 만인을 기다리는 책이 아닌 서재에서 기록되고 읽히는 책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