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앉아 현재를 오독할 동안
나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좋지 않았다. 뿌연 세상 속에서 혼자만의 색칠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세상은 흥미로웠고, 판타지였고, 나는 학교에 가면 찌질할지라도 내 방에서만큼은 뛰어난 주인공이었다. 안경을 쓰면 콧등이 간질간질하고 머리가 아팠다. 불편하단 이유로 안경은 쓰지 않았다. 렌즈를 끼면 눈이 일자로 빨갛게 충혈되었다. 나는 렌즈도 보이콧했다. 그래도 좋았다.
대학에 들어가는 또 하나의 환상을 완성하면서는 내 눈이 먼 곳은 물론이고 가까운 곳조차 잘 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난 괜찮았고, 여전히 안경 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가끔 내가 답답했던 한 친구는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안경을 억지로 써보게 했으나, 그때마다 나는 갑자기 투명해진 시야에 고통을 호소했다. 눈물이 찔끔찔끔 났다. 나름대로 혹독한 경험이었으나 친구와 만날 시간조차 나지 않자 나는 그 통증마저 그리워하게 되었다.
여차 저차 하여 결혼을 하고 내 인생의 반려자가 생겼다. 그는 내 눈을 걱정스러워했으나…… 뭐, 본인이 좋다니 두고 보는 심정인 것 같았다. 사실 두어 번 안경을 맞출 것을 권고하였으나 나는 유쾌히 흘려들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먼지들이 내겐 보이지 않았다. 접시가 깨진 것도, 기름이 바닥나고 있는 것도 관리비 통지서가 우편함에서 방치되어 썩고 있는 것도 나는 몰랐다. 마침내 그는 용단을 내리기로 한다.
그의 손에 이끌려 안경을 새로 맞췄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 눈물이 줄줄 흘렀다. 급격히 선명해진 시야는 생소하기만 했다. 판타지는 깨졌다. 뽀얗던 세상은 차갑게 각이 졌다. 깨진 유리조각이 폐부를 찔렀다. 가슴에서도 피가 눈물처럼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거울을 보니 그때서야 내 꼴이 보였다. 29살의, 여자, 인문대 출신, 경력도, 스펙도 없이, 꿈도 계획도 없이, 방치되어, 허름한, 먼지 쌓이는, 배터리가 방전된, 시계. 하지만 시간은 배터리와 상관없이 달려 나갔다.
내가 이불속 방공호에서 겨우 탈출하여 책 한 페이지를 힘겹게 넘길 때, 그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고 책을 읽는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퇴근도 한다. 조그만 시간을, 잘라가며 덧붙여가며 철컹거리며 칙칙폭폭 읽는다. 내가 소설에 앉아 현재를 오독할 동안 현실에 기꺼이 앉아 소설을 정독하고 있었다. 안경을 쓰고 보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어느 새 나 빼고 모두 지하철에 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