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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래 Jun 30. 2022

큰 나무 아내


아내와 나는 86년 초에 만나서 그 해 결혼을 했다.

아내는 당시 서른하나, 나는 서른 살로 만나 함께 살기 시작했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의욕하나 만으로 "맨땅에 헤딩하듯"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아내가 나보다 한 살 많은 연상이다. 요즘은 여자가 연상인 경우가 주변에 더러 있지만 당시는 연상인 여자와 결혼하기는 쉽지 않은 조화이다. 결혼 초기는 "내가 시집을 못 가는 노처녀 한 명을 구제했다"  늘 놀렸다.


나는 직업군인 생활을 하다가 30대 중반에 전역을 하고 사회에 나왔다. 당시 군 전역자의 퇴직금으로는 서울에서 월세라도 방 한 칸을 구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내와 나는 신혼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동생들과 합해서 함께 살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의 가족 아내와 나, 아이 둘, 그리고 동생 둘, 어머니, 할머니 총 여덟 명 대가족의 살림을 아내가 맡았다.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노환으로 다리를 쓰지 못하셨다.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할머니는 웅크리고 바닥을 기어서 생활을 하셨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의 활동영역은 마루에서 방, 화장실등 극히 제한적이었고 아내는 할머니의 제한된 영역의 움직임을 도와 드렸다. 가족 누구도 하기 싫어했던 일을 아내가 전담을 해서 할머니를 보살피고 있었다. 돌아가 시 전날 할머니는 잠자리에 누워 있다가 본인의 옷이며 이불에 용변을 엄청나게 하셨다. 당시 나도 어머니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아내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이불과 옷을 혼자서 뚝딱 치우고는 할머니를 번쩍 앉아서 목욕을 시켜 드렸다. 그날 할머니는 죽음이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인지 의식이 뚜렷하지 않았다. 아내가 할머니를 씻겨서 잠자리에 다시 눕혀 드리자 의식이 없는 할머니는 손주 며느리 손을 꼭 잡으시고 "고맙다" 말을 희미하게 겨우 하셨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가셨고 그때 아내의 나이는 마흔이 갓 넘었을까 싶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 마당에는 큰 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나무는 느티나무과로 수령이 약 100년 정도 되었을까 싶다. 예배를 마치면 나무 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바자회를 하면 나무 밑에서 하고 어린이집 아이들이 나무 그늘 밑에서 야외 수업을 하고 가을이 되면 아이들이 책갈피에 넣을 낙엽도 모으고  하는 교회의 큰 나무이다.  교회를 생각하면 교회정문 앞에 있는 큰 나무가 먼저 떠오르지만 성도들 간에서 큰 나무의 고마움과 나무의 소중함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나무가 늘 푸르른 빛으로 항상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인지...


동생 둘이 결혼을 하여 집을 떠났다. 어머니가 계셨지만 아내는 집안의 며느리로 장남의 아내로 자기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내가 사회에서 제자리를 정착하지 못하여 박봉을 받을 때였고 내 아이들 둘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을 할 시기 인지라 급여를 받고 돌아서면 적자여서 가불인생을 사는 시절이다. 아내가 어떻게 만들었지는 잘 모르지만 동생들 결혼에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을 내놓았다. 집안의 행사마다 어머니는 은근히 아내에게 기대를 했고 그때마다 아내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마법같이 없는 돈을 만들어 내놓았다.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수영장에서 쓰러져셨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누가 연락을 했는지 119도 와 있었다. 앰뷸런스로 어머니를 모실 때 아내가 자신이 함께 타겠다, 함께 타야만 한다고 했고 두려워하시는 어머니 손을 잡아드렸다. "별일 아닐 거예요" 말을 반복하면서 평소에 겁이 많으신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 드렸다. 그날 어머니는 본인의 아들 둘과 딸보다 며느리의 손을 잡고 먼 길을 가셨다.


큰 나무가 백 년이 지나가자 사람처럼 아프기 시작을 했다. 나무의 밑동에 콘크리트로 살을 채우고 몸통에는 환자가 붕대를 두르듯 천을 두르고 링크를 꼽고 꼭 사람이 병원 가면 치료를 받듯 흡사하게 치료가 시작되었다. 가지도 "슝슝" 잘라내어 그늘이 다 없어지고 있었다. 그때야 늘 함께 있을 줄 만 알았던 큰 나무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교회 성도들은 알게 되었다.


아이 둘이 가정을 꾸려 각자의 길을 위해 떠났다. 아내와 결혼을 하여 초기 6개월만 둘이 남들처럼 신혼같이 살지 않았나 싶다. 그 후부터 우리 주위는 항상 가족이 있었고 그들과 살과 살을 부딪치며 북적되었고 세상의 고민도 식구 수만큼 들고 살았다.


세상은 공평하여 젊은 시절 신혼기간이 없었다고 노년에 둘 만의 신혼을 맞고 있다. 때로는 노년의 신혼 이 순간이 해가 저무는 금빛 석양처럼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생활을 면서 너무 여유롭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 늘 불행은 완벽 뒤에 오기에 알 수 없는 불행이 어떤 순간에 올까 걱정이 될 때가 있다. 노년이 되면서 가끔씩 아프면 젊을 때보다 더 아프고 더 힘들다. 숙명으로 오는 헤어짐을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교회 앞 백 년 된 큰 나무도 쓰러질 수가 있기에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내를 다시 한번 가만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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