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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Apr 26. 2023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내게로 오기를 원해요.


박완서의 말 

소박한 개인주의자의 인터뷰



궁극적으로 작가는 사랑이 있는 시대, 사랑이 있는 정치, 사랑이 있는 역사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고로 우리는 사랑이 있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어요. (중략) 우리 시대는 꿈이 없는 시대, 재미가 없는 시대, 상상력이 없는 시대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회복하는 일, 사랑의 능력을 되찾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랑이 가슴에 차 있지 않은 사람에게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완서의 말> P 39







소설가 박완서의 생기로운 인터뷰

이슥한 세월 뒤의 문학, 삶, 여성


소설가 박완서는 1970년 『나목』으로 등장해 그 40여 년 뒤 유명을 달리한 뒤에도 한국문학의 시들지 않는 거목으로 생기롭게 살아 있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소박한 진실을 그만의 편안한 말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싫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고 교훈을 주거나 설교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휩쓴, 그리고 지금도 이따금 머리를 들이미는 극단의 이념이나 철학을 멀리했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태도로 개인의 소박하고 내밀한 영역을 높여 말했다. 그러면서도 전쟁을 겪은 사람으로서, 여성에게 박한 사회의 여자로서,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깊은 통증을 지나온 사람이 갖는 강단을 잃지 않았다.



박완서 :『나목』이 그 당시에 화제가 됐던 것은요, 지금도 그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만, 그 작품이 박수근 씨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특히 PX 부분은 체험을 거의 거르지 않고 쓴 부분이죠. 1년 동안 작품 속의 남녀처럼 저도 거기서 일을 하고, 그분도 거 깃 그림 그리고 그랬었죠. 그리고 후에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그걸 썼는데, 물론 거기 나오는 것처럼 어떤 러브 스토리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저는 스무 살쯤이었고 그분은 거의 저의 아버지 연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분 때문에 소설을 썼으니까요. 문학 애호가였었지만 소설가가 되겠다는 건...., 아무튼 처음 글 쓸 땐 전기를 쓰려고 했어요. 소설에서도 나옵니다만 유작전을 보러 갔었어요. 그전까지는 그분의 제대로 된 그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PX에서 초상화 그리는 거밖에. 그걸 보러 갈 때 저는 그냥 같이 일하던 사람이 조금 유명해져서 갔죠. 물론 지금같이 그렇지는 않았어요. 유작전 할 때만 해도,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그림값이 오르기 전이었는데도 가정에서 있던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엄청난 값을 부르더라고요. 거의 살 수 있는 그림도 없고, 지금은 뭐, 한 호에 1억 얼마라고 하는데 그게 다 유족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분도 참 끝끝내 정말 힘들게 살다 돌아가셨어요. 그럴 때 여러 가지 그분이 고생하신 거, 얼마나 싸구려 그림으로 한때를 연명했나..... 뭐, 이런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들이 뒤엉키면서 괜히 그분을 대신해서 억울한 것도 있고, 그래서 어떤 증언적인 의미에서 글을 쓰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분에 대해서는 그림만 갖고 값이 얼마 얼마 하지 생애에 대해서는 아는 분이 얼마 없더라구요. 

그 무렵만 해도 60년대 말 70년대 초지요. 제가 1970년에 그걸 썼으니까요. 당시에도 이중섭 화백에 대해서는 굉장히 알려져 있었어요. 그 사람은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그때도 그림값은 이중섭이 더 높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6.25 중에 부인을 일본으로 보내고 술에 곯아서 거의 정신착란같이 됐던 것도 굉장히 예술가 다운 삶으로 미화되고, 미화됐다기보다, 아무튼 멋있어 보이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이중섭 씨의 그런 사람보다 박수근 씨가 산 게 더 비극적으로 생각이 되더라구요. 술로 자기 정신을 흐려놓지도 않고, 죽으나 사나 그 전쟁의 와중에서 붓대 하나로 식구들을 부양하고, 또 참 견디기 어려운 수모도 많이 받고 하면서도 그 싸구려 그림을 몇 십 장씩 그려서 연명해간 게 훨씬 비극적으로 여겨지고, 그래서 그걸 증언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쓰게 됐죠. (중략)

논픽션을 쓰면서 영 성이 차질 않아요. 그래서 딱 소설로 바꿨을 때, 제 생각으로는 그게 내 자기 발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소설로 써보자 하니깐, 사실에 근거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쓸 때와는 달리 내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로부터 놓여나니까 굉장히 자유스러워지더라구요. 그래서 쓴 게 『나목』이에요. (중략)

여자 주인공에서 제가 많이 투사가 됐어요. (중략) "집안이 바로 되려면 네가 죽고 오빠들이 살아남았어야 했는데" 하는, 그리고 이런 때의 어떤 전율 같은 것, 그리고 그것이 쭉 그 여자의 정신세계를 심하게 일그러뜨리면서 거기서 다시 본연의 자기를 찾기까지의 과정 같은 것이 제가 아주 굵은 줄거리로 깔아놓은 건데, 사실은 그것이 아주 주의 깊게 읽히지는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P75-80




『박완서의 말』은 소설가 박완서의 이력이 절정에 다다라 있던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모두 일곱 편의 대담을 담았다. 이 대담들에서 그는 마흔 살에 소설가의 인생을 열어준 『나목』이며 그 뒤 출간한 작품들에 관해 속 깊은 문답을 주고받고, 작가이자 개인으로서 자신을 성숙하게 만든 경험들을 털어놓는다. 가족, 교육, 어머니에게서 받은 지대한 영향, 학창 시절, 도시와 시골, 가난과 계층, 그리고 남성의 삶과 여성의 삶. 그는 지금도 유효한 이런 주제들 앞에서 오랫동안 연마한 생각을 날이 서지 않은 편안한 음성으로 들려준다.





소설에서의 자기 안목은 

독서에서 얻은 것

작품의 밑받침은 

체험에서 얻은 것

소설 쓰기는 

충분한 구상이 전부





박완서 : 나는 사실 '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합니다. 1976년에 일지사에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첫 창작집을 간행한 이후 스무 권에 가까운 작품집을 냈으니깐 평균 1년에 한 권꼴로 작품을 써온 셈인데,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축적된 에너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습작을 많이 한 것도 전혀 아니고 그렇다고 남다른 파란만장한 체험을 가졌다고 할 수도 없어요. 내 식구들마저 『나목』이 당선되기까지는 글을 쓰는지조차 몰랐으니까요. 단지 어려서부터 남의 작품을 읽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았고, 독서하는 버릇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반드시 자기 전에 책을 읽다 잠들곤 해요. 작품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작가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봐요. 소설에서의 자기 안목은 독서에서 얻은 것이고, 체험이 작품의 밑받침이 되고, 그리고 원고지 위에 쓰기까지 충분한 구상이 내 소설 쓰는 태도의 전부이지요. P28

고정희 : 선생님의 작품 구상은 주로 어디에서 얻어 어떻게 이뤄지는지요? 말하자면 영감을 얻는 소스 같은 것 말입니다.

박완서 : 줄거리를 생각할 때도 있고 어떤 성격을 먼저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작품을 쓸 때 누가 이런 것 좀 써달라 해서 소재를 제공할 때도 있지요. 그 많은 생각 중에 어느 날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가 가슴에 확 와닿아서 작품 구상을 유발할 때가 많아요. 내 소심한 탓에 반드시 비상금을 비축하고 살아왔듯이 창작에서도 늘 머릿속에는 구상이 몇 개씩 비축되어 있어요. 발효의 시기가 끝나면 하나씩 꺼내서 쓰지요. 또 밥상머리 자녀들의 얘기도 소설의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데 중요한 몫을 차지해왔어요. 그러니까 내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나 소재는 문학에서 받은 경우는 거의 없고 문학 외의 사람들이지요. P37-38








나는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는 일이 별로 없어요.
뭐든 의식화해서 기억 속에 챙겨두죠

- 소설가 박완서 -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군) 출생으로,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이주했다.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작가 한말숙과 동창이다. 1950년 서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중퇴하게 되었다. 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박완서에게 한국전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없는 기억이다.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거의 폐인이 되어 돌아온 `똑똑했던` 오빠가 `이제는 배부른 돼지로 살겠다`던 다짐을 뒤로하고 여덟 달 만에 죽음을 맞이하고, 그 후 그의 가족은 남의 물건에까지 손을 대게 되는 등 심각한 가난을 겪는다.


그 후 미 8군의 PX 초상화부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그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1953년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과 결혼하고 살림에 묻혀 지내다가 훗날 1970년 불혹의 나이가 되던 해에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이후 우리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까지 뼈아프게 드러내는 소설들을 발표하며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긋고 있다. 박완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 적절한 서사적 리듬과 입체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다채로우면서도 품격 높은 문학적 결정체를 탄생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는 우리 문학사에서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풍요로운 언어의 보고를 쌓아 올리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녀는 능란한 이야기꾼이자 뛰어난 풍속 화가로서 시대의 거울 역할을 충실히 해왔을 뿐 아니라 삶의 비의를 향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구도자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한국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다룬 데뷔작 『나목』과 『목마른 계절』,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아저씨의 훈장』, 『겨울 나들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을 비롯하여 70년대 당시의 사회적 풍경을 그린 『도둑맞은 가난』, 『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까지 저자는 사회적 아픔에 주목하여 글을 썼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부터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작가는 행복한 결혼은 어떤 형태인가를 되묻게 하는 소설인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점점 독특한 시각으로 여성문제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또 장편 『미망』,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에서는 개인사와 가족사를 치밀하게 조명하여 사회를 재조명하기도 한다.


『배반의 여름』은 1975년 9월에서 1978년 9월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조그만 체험기」, 「흑과부黑寡婦」,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등에서 볼 수 있듯이 박완서가 그리는 모성의 힘은 실로 놀랍다. 성균관대에서 열린 ‘2006 호암상 수상자(예술상) 초청 강연회’에서 박완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 문학의 뿌리는 어머니”라고. 박완서 특유의 수다스러움으로 풀어내는 모성의 힘은 힘센 것들만이 권력을 쥐고 판을 치는 현대산업사회에서 뒤로 처진 자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위무해 준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는 1987년 1월에서 1994년 4월까지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가족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 네 개나 있는데 그중「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남편의 죽음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아들의 죽음을 담고 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특이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체로 되어 있는데 담담하게 이어가는 주인공의 목소리에서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저녁의 해후』에는 1984년 1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해산바가지」, 「애 보기가 쉽다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하층민들의 인간애는 가진 자들의 야만성과 대비되어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은 1979년 3월에서부터 1983년 8월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수록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속물성과 위선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젊은 것들의 무관심과 조롱 속에서 외롭게 늙어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담아낸 「황혼」, 「천변풍경泉邊風景」과, 출세한 자들의 허위를 그린 「내가 놓친 화합(和合)」,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등이 그것이다.


『미망』은 조선조 말기에서 6ㆍ25 전쟁 직후까지 그 파란만장했던 시대를 한 개성상인의 가족사를 통하여 재창조한 대하소설이다.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고난과 격동의 시대를 험준한 산을 넘듯 숨 가쁘게 살아온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박완서 소설 문체가 도달한 궁극적인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작가는 사람과 자연을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느낀 기쁨과 경탄, 감사와 애정을 담아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냈다. 「친절한 책 읽기」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연재했던 글도 함께 실어 노 작가의 연륜과 성찰이 돋보이는 글을 선보였다. 1993년부터 국제연합아동기금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1994년부터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1988년부터 제2건국 범국민추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 작가 상, 『엄마의 말뚝』으로 제5회 이상문학상,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과 제3회 이상문학상,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제38회 현대문학상 등을 받았다. 2006년, 문화예술인으로서 처음이자 여성으로서도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소 입버릇처럼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라고 고백해왔던 그녀는 전쟁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경험으로 글을 써왔다. 여러 편의 장편소설과 수필집, 동화집을 발표하고, 2010년 8월 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마지막으로 2011년 1월 22일, 담낭암 투병 중 별세했다. 경기 구리시에는 '박완서 문학마을'이 조성될 예정이다.


한국문학 작가 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대산문학상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2006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타계 이후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그 외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소설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기나긴 하루』,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한 길 사람 속』,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등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내게로 오기를 원해요.

- 소설가 박완서 -








마무리.


오에 겐자부로의 첫 장편소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와 박완서의 <나목>은 작가의 소신, 소망, 작지만 크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한국 현대 소설을 앞으로 읽어나갈 계획인데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나도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박완서의 책 제목들만 읽어도 슬퍼지려고 했다. 근대 넘어 현대로 오는 소설, 지금의 소설을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될지 사실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죄다 슬플 것 같다는 예감이다. 


'제 몸 같은 건 역시 남편뿐이에요.'p140라는 말이 왜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한 해에 남편과 아들을 잃고, 사위와 딸이 제집 비워 놓고 들어와서 살았지만 자신은 깨는 시간이 달라 불편하고 하던 것들 못하고 자신 방에 꼼짝 못하고 있게 돼서 무슨 죈가 그런 하소연이었는데.. 그 별것 아닌 것들이 서글프게 느껴졌나 보다. 2011년 담낭 암으로 별세하셨으니 이미 10년이 훌쩍 넘어섰다. 별이 지는 것들을 보는 것도 참 마음이 아픈 일이다. 그분들 마음이야 내가 알 길이 없겠지만...


'신여성은 그 어머니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와 차별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그 시절에 있을법하지 않은 말이지 않나 생각했다.  그 어머니 이중적 말과 행동이 기이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억척스러운 어머니상 그대로였고, 박완서는 그런 어머니 덕분에  그런 신여성의 사상을 간직할 수 있었다. 전쟁을 지나 근대의 평범한 여성들처럼 살아왔고 무르익어 마흔에 흘러넘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 쓰기는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하셨지만)


전쟁이 없었다면 보수적이고 사회적인 관심이 없는 완전한 순수문학을 했지 않았을까 하시지만 내면의 저항의식이 끊임없이 자신을 담근 질하지 않았을까. 왠지 나는 박완서를 알았지만 사실 전혀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예전에 읽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몇 권 책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작품에 한해서도 뭘 안다고 할만 한게 하나도 없다. 가끔 박완서와 박경리를 헷갈려 하기도 한다. 


통일 후 한 세기 정도 두고 보면서 천천히 체계가 바뀌고 공존하기를 바라고, 자본주의의 속성이 더욱 무자비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도 하셨다. 그런 미래를 잠깐 생각해 보기도 했다. 끝으로 피천득과의 대화가 좋았는데 그 두 분 이 세상에 없지만 피천득이 말했듯이 "나의 글은 다른 이들의 생각 속에 존재하게 되겠지요"처럼 나에게도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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