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일기 스물여덟 번째
우리 애가 똑똑해서 그런지(아님) 종종 새로운 게 필요하다. 사료도 새로운 맛, 놀이도 새로운 놀이. 그리고 산책길도 좀 다른 걸 원하는 분이 후추다. 물론 후추는 익숙함과 편안함도 좋아한다. 양말 주고 받기 놀이는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것 같다. 가끔은 남편 부모님 집에 놀러갔다 오는데 그럴 때면 얘가 확실히 우리집을 매우 편안해하는구나, 느낀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공간에 신이 나서 놀지만 집에만 오면 혼곤한 잠으로 빠지는 걸 보니 말이다.
다만 너무 익숙해지기 전에 조금 더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도 좋겠다는 극성(!) 반려인의 생각, 호기심을 많이 느끼도록 하고 싶은 나만의 반려 생활 기조를 가지고 지낸다. 후추 아직 한창 자기 세상을 넓힐 때이기도 하고.
그래서 요즘은 새로운 산책 코스를 개발했다. 집 근처를 한 바퀴 도는 코스는 4-5개의 변주가 가능한데, 후추는 거기에 이미 빠삭한 상태였다. 어디쯤 가면 어디선가 자기가 싫어하(기보다 무서워하)는 개짖음 소리가 들려온다는 걸 알고 - 그래서 자꾸 다른 길로 가자고 한다 - 어디까지 가면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라는 것도 알았다. 이제 후추와 나는 일주일에 3-4회쯤은 뒷산으로 나간다. 후추가 오기 전에는 몇 년 동안 딱 한 번 가본 것이 전부였던 곳이다. 산에 관해서라면, 등반의 성취를 위한 곳이라기보다 아주 조금쯤(!) 운동을 한 기분을 느낀 뒤 시원달달한 막걸리를 마시기 위한 장소로 여기곤 하던 사람으로서 이렇게 자주 산으로 향하는 생활은 뭐랄까, 매일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가 뒷산을 오르기 위해 가다 보면 나타나는 돌계단이 있다. 그 계단이 저기 보이는 순간부터 나는 후추의 흥분을 느낀다. 무언가를 그토록 설레할 줄 안다는 게 번번이 신기하고 아름답다. 후추의 아름다움은 그러므로 나를 덩달아 달리게 하는데(나의 30대를 통틀어 요즘이 가장 많이 달리고 있는 나날이다) 오르막을 달리면서 날벼락처럼 가빠오는 숨과 존재감을 뽐내는 허벅지 근육을 의식하는 동시에 어제보다 조금 더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을 느낄 때면 또 감탄한다. 후우우츄후후우우야아아아, 하학학칵, 고마워후어어어, 으헥헥헥. 이런 내 말을 들은 건지 아닌지 앞만 보고 달려 이윽고 흙을 딛는 후추의 발. 그때부터 그곳은 오직 후추의 세상이 된다. 집 앞 산책로에서보다 훨씬 행복감에 젖어 냄새를 맡고 발을 굴리는 후추를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얼마 전 일요일, 이게 좋아서 게으름 부리고 싶은 남편을(당연하다. 직장인의 휴일 늦은 오전이 얼마나 꿀 같은가!) 억지로 끌고 나온 참이다. 입이 조금 튀어나온 것을 못 본 채 하고 후추의 신남이 전염되길 바라며 우리 셋은 뒷산을 올랐다.
후추는 이제 우리 둘을 자기의 가족/무리/보호자라고 명확하게 인식하는 듯하다. 둘 중 한 사람의 귀가가 늦으면 그가 집에 나타날 때까지 바깥 기척을 살피는 데에 약 22%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셋이 한 곳에 다 모이면 그제서야 이 무리에 100% 집중하며 놀기도, 쉬기도 하는 것이다. 산책은 오죽할까. 뒷산 산책을 함께 나선 이 일요일 오전이 후추는 너무나 신이 났다. 평일에 나와 둘이서 산에 오를 때보다 훨씬 기뻤다. 그래서일까. 후추는 평소보다 더 나아갔다. 뒷산 산책을 시작한 이래 가장 멀리까지 가보았다. 마침 그날은 비가 내린 다음 날로, 깨끗하게 깊어가는 가을에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조용하고 맑은 숲이 충격적으로 환상적이었다.(남편의 삐죽 튀어나온 입이 헤에 벌어진 것은 물론이다) 우리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보려고 애쓰고, 아무리 해도 사진에 담을 수 없는 엄청난 아름다움을 인식하며 후추를 따라 앞으로, 위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쌀쌀한 바람에 아랑곳 하지 않고 땀이 송글송글 맺힐 때쯤 한 그루 멋진 소나무가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발길을 단단히 붙잡는 자태였다. 숲은 이렇게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구나. 자연은, 가을은 정말로 아름답구나, 생각하며 잠시 서서 나무를 보았다. 후추도 잠시 숨을 고르고. 그리고, 나는 그 뒤로 거짓말처럼 맑은 햇빛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너른 터를 보고 말았다. 보고 있으면 자연히 겸허해지는 소나무가 지붕처럼 드리운 길을 지난 곳이었다.
숲 속에 갑자기 나타난 햇빛 가득한 터라니. 이건 너무 가짜 같다. 조금은 다른 세계에 진입하는 기분으로 우리는 후추와 그곳에 진입한다. 이 풍요로운 공간에 역시 낙엽이 비처럼 내리고 있고, 숲은 덩달아 고요하고 소란하다. 나는 홀린듯 그곳에서 처음으로 후추의 목줄을 놓아보기로 한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에는 지나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혹시나 걱정스런 마음에 공터의 양쪽 끝에 나와 남편이 각각 선 채로 그렇게 있기로 한다.
후추는 그 작은 공간에서 한껏 자유로웠다.
똑똑한 우리 강아지 후추는 나와 남편이 만든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영역을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우리가 만든 품 안에서 신나게 뛰었다. 혀를 길게 빼고, 네 발이 아주 오래 공중에 머물러 마치 날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펄쩍 펄쩍 뛰었다. 그런 우리 위로 흩날리는 낙엽들. 안아주는 듯 따뜻한 볕. 포근한 잔디밭. 그곳은 분명히 천국이었다.
그날 밤, 남편에게 말했다.
“진짜 완벽한 날이었지? 죽는 순간에 딱 생각날 것 같은 날이었어.”
그 말은 내가 드물게 확신을 갖고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만 같다. 이게 다 후추가 준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