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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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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May 07. 2022

축! 후추 방송 탄 이야기

후추일기 서른일곱 번째


경축! 후추 방송 탔다! 예에!


무슨 일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후추와 나의 저녁 풍경부터 그려볼 참이다.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저녁 식사를 하고, 바깥 공기도 충분히 쐬고, 인형 잡기 놀이도 하고, '후추 잡으러 가자' 놀이(친구가 집에 놀러와 알려준 놀이로, 약간 술래잡기와 비슷하다. 내가 술래가 되어 후추를 잡으러 달려가는 건데 요 작은 녀석이 도망가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도 하고 나면 후추는 만족한 듯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자기 자리에 털썩 엎드린다. 동시에 퍼지는, 나의 육아 퇴근을 알리는 한숨소리! 나는 그제야 나의 시간이 왔음을 기뻐하며(오해하지 마, 후추야. 너와 노는 것 당연히 즐겁지만 나는 다른 걸 할 때도 즐거워... 이해 좀 해주라) 맥주도 한 캔 따고, 읽던 책을 펼친다. 다가오는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을 기대하면서. 그렇지만 기대는 기대일 뿐, 그날 어떤 하루를 보냈느냐에 따라 후추는 곧장 잠들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이 많지는 않다. 무슨 말이냐 하면,

 

후추는 꼭 잠투정을 한다.


아니, 세상에. 조카가, 친구네 어린이가 아기 시절에 잠투정을 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강아지가 잠투정한다는 얘기는, 나는 정말이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여러분, 세상에는 잠투정하는 강아지가 의외로 많더라고요). 어째서인지 잘 시간이 지났는데 후추는 계속 무언가를 요구하고 찡찡댔다. 양치도 다 했고, 오늘치 할 일은 진짜 더 이상 없는데 또 뭘 요구하는 걸까. 뭐가 부족한 건지 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곧바로 책장을 덮고는 생각했다. 뭐지? 더 놀고 싶은 건가 싶어 다시 인형을 던져보지만, 땡! 후추는 단호하게 자신이 원하는 게 그것이 아니라는 눈빛을 쏜다. 그럼 배를 만져줄까? 땡! 후추는 내 손길에 자리를 피하더니 다시 다가와 찡찡댄다. 맥주의 김은 빠져가고, 읽던 곳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하는 고통이 이어진다. 에이, 나도 몰라! 나는 이제 '후추 네가 뭐라 하든 반응하지 않기' 모드로 돌입한다. 하지만 그게 잘 될 리가 없다. 자꾸 후추는 "끼잉-" 하고 나는 "왜 그래에? 뭐 하고 싶은데??"라고 묻고, 다시 책을 덮고...


그러다 아주 우연히 해본 것이다. 그냥 읽던 책을 소리 내서 읽어보기로.

후추의 찡찡대는 소리를 외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어느 오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며칠 전, 한참 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아 통화를 하고 있으려니까 나를 지켜보던 후추가 가만히 곁에 누워 졸기 시작했다. 그때는 단순하게 ‘내 말소리가 안심 되나보다’ 생각했는데 어쩜! 잠투정 하는 후추에게 책읽기는 효과 만점이었다. 책을 읽자 스르르 잠이 드는 후추! 야, 너 그냥 잠투정 한 거였어? 나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다시 깰까봐 책읽기를 멈추지 않고 한참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이제 우리의 루틴이 되었다. 오후에 짧게 자다 깨서 까부는 후추에게, 잘 시간이 지났는데 늦은 밤에도 찡찡대는 녀석에게 나는 책을 읽어 주었다.


여기까지가 방송 데뷔(?)의 배경이다.

 

그러다 문득 고민이 생긴 것이다. 지난 일기에서 얘기했듯이 어쩐지 후추는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 가끔 내가 읽는 책은 어떤 내용인지 말하기 곤란할 정도로, 사실은 내가 읽기도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책이었는데 그러면 이걸 계속 읽어줘도 될까 싶어졌다. 안 읽고 싶었다. 그래, 이건 아니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듯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읽어주듯이, 후추에게 읽어주면 좋을 다정한 텍스트가 없을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요즘 챙겨 듣는 팟캐스트 <북북서로>에 사연을 보낸 것이다. 아래에 나의 신청 내용을 공개한다.      


"저희 집 강아지는 꼭 잠투정을 합니다. 졸리면 그냥 자면 될 텐데 졸려서 눈이 감기는 와중에 꼭 “끼잉-”하면서 저에게 뭔가를 요구해요. 으이구. 이것저것 해보다가 최근에 발견한 비법은 바로 ‘책 읽기’입니다. 요 귀여운 녀석이 제가 소리를 내 책을 읽으면 이내 투정을 멈추고 잠이 들어버리는 거 있죠! 그래서 말인데요, 이럴 때 강아지와 함께 읽으면 딱 좋을 사랑과 다정한 마음의 시를 추천해주세요! 그냥 이런저런 책을 읽어줘도 좋겠지만 얘가 왠지 알아듣는 것 같단 말이죠?! ㅎㅎㅎㅎㅎ 강아지에게 저의 뜨거운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두 시인님이 도와주세요:)"


기쁘고 놀랍게도 얼마 뒤, 프로그램의 대답이 방송되었다. 정말 좋아하는 김현 시인님의 추천으로 아름다운 시를 소개받은 것이다. 그 시는 바로, 김명수 시인님의 「내가 기르는 강아지들」이었다. 심지어 김현 시인님의 낭독까지 선물 받을 수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김현 시인님의 어떤 낭독을 열 번도 넘게 다시 들은 적도 있다. 이건 후추뿐 아니라 나를 위한 매우 특별한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에게는 잠이 필요한 순간에 늘 돌아갈 수 있는 책갈피 같은 시가 하나 마련되었다. 이 사건이 행복해서 후추에게 김현 시인 님의 시 낭독을 여러 번 들려주기도 했다. 솔직히 후추는 그 낭독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얼마나 멋진 일이니, 후추야. 정말 마법적이고, 시적인, 우리만의 특별한 순간 아니겠어?


** 김현 시인님의 낭독은 아래 링크를 타고 들어가시면 들을  있습니다. 40 37초부터 들어보세요! (사연부터 들으려면 38분부터 들으시고요. 그나저나 이자람 님 편도 너무너무 재미있으니까 그냥 다 들으셔도 좋아요^^)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9371/clips/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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