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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May 24. 2024

사소하고 사소하지 않은

아다니아 쉬블리 장편소설 『사소한 일』

몇 개의 사건이 제각기 떠돌다 (결국)만나는 경우가 있다. 일단 만난 뒤에는 도무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그래서 자신의 삶에 깊게 흔적을 남기는 일들이.


2023년 10월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1)좋아하고 존경하는 동료들과 'W.G. 제발트'를 함께 읽기로 했고, 2)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반격한 것을 빌미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면적인 학살을 시작했다. 제발트를 잘 알았다면,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더 관심을 가졌다면 1)과 2)는 훨씬 빨리 만났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다.

해가 끝나는 12월 말까지, 두 달 반동안 제발트를 읽었다.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가던)1944년 독일에서 출생했고, 홀로코스트에 침묵했던 부모 세대에 깊은 반감을 가졌고, 홀로코스트 피해 등 폭력의 기억과 망각이라는 문제에 천착했던 제발트라는 작가를 읽으면서 지금 나의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떠올리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대인 피해자들과 유대인 가해자들 사이의 아득하고도 가까운 거리를 생각하는 일은 인류가 반복하는 가혹한 폭력성을 생각하는 일이었다. 제발트를 읽는 두 달 반동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민간인을 가차없이 학살했다.("첫 6주간 14,000여 명이 살해되었는데 그중 어린이가 5,600여 명(40%)이었다."(질베르 아슈카르,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 9쪽)) 동료들과 마지막 모임에서는 지금의 홀로코스트에 우리가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 과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고민하기도 했다.

이후 겨우 했던 것은 책을 찾아 읽는 일이었다.

『아! 팔레스타인 1, 2』(원혜진, 바이북스)을 읽었고, 『필리스트』(원혜진, 만만한책방)을 읽었고,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질베르 아슈카르, 리시올)을 읽었고, 오랫동안 책장에서 먼지를 맞던 『팔레스타인』(조 사코, 글논그림밭)을 다시 꺼내 읽었다. 시온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 등 서구권의 묵인(또는 비호) 아래 팔레스타인을 식민 지배해오고 있다는 사실, 팔레스타인의 자치 정부 내에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당이기도 한 '하마스'를 오직 폭력 테러 단체인 것처럼 왜곡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 현재 그 어느 때보다 극우화 된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을 향해 '인종 청소'를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소한 일』(아다니아 쉬블리, 강)을 읽었다.


『사소한 일』을 구매한 것은 (또다시)2023년 10월이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이 소설을 쓴 작가에게 수여될 예정이던 리테라투어상(자유상) 시상식이 연기되었다는 기사를 본 후였다. 이 작품이 '반유대주의적'이라는 이유였다고 했다. 반유대주의적이라는 프레임은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에 반대하는 쪽에 붙이기 좋아하는 것으로, 20세기에 유대인을 겨냥했던 잔혹한 홀로코스트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 유럽 사람들에게는 특히 손쉬운 입마개가 되곤 한다. 그런 배경으로, 독일(프랑크푸르트)에서, 반유대주의라는 이유를 들어, 팔레스타인의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에게 주려던, 그 이름이 '자유상'인 상의 시상을 연기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읽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으로 책을 샀지만, 곧장 읽지는 못했다. 얼마 전, 책을 다 읽고 나서 200쪽이 채 되지 않는 이 소설을 읽는 데까지 내게 필요했던 시간을 생각했다.


소설 『사소한 일』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1949년,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의 '나크바(대재앙)'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후를 배경으로 한다. 이야기가 황량하고, 극심하게 더운 사막 풍경의 묘사로 시작하기 때문에 시작 단계에서 나는 이미 숨이 막혔다. 그리고 군인들. 팔레스타인을 침략하고, 점령을 강화하기 위해 침략한 지역에 주둔하는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사람의 흔적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막 지역에 진지를 구축한 뒤 매일 지독한 수색에 나선다. 이들의 끈질김, 이들의 맹목적 태도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다는 사실, 아니 더 악랄하고 지독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잠시 눈앞에 깜깜해졌다.


1부에 등장하는 유일한 대사-'그'로 표현되는 부대장의 말-에서는 이 끈질김의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망명하는 수많은 우리 민족을 수용할 만큼 넓은 땅을 모르는 척 놔둘 수 없다. 우리 민족이 귀향하지 못하도록 방관할 수 없다. 지금은 잠입자들과 한 줌의 베두인들, 낙타들 빼고는 아무것도 없어 황무지처럼 보이는 이 땅이 실은 우리 선조들이 수천 년 전에 지나갔던 곳이다."(50쪽)


식민자의 언어는 논리정연하지만 오류 투성이다. 수천 년 전 자신의 선조들이 지나갔다던 그 땅은 이후 로마인도, 터키 제국도, 영국도 차지했던 땅이 아닌가.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은 '우리 선조'의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에서 지금 살고 있던)을 모조리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선조들의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언제 어떻게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지 모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내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이 말은 '위대한 아리아인들'의 국가를 위해서 유대인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했던 나치의 주장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와 군인들은 며칠 뒤 마침내 샘물 근처에 있는 한 무리의 아랍인들을 발견한다. 군인들은 즉시 그들을 사살하고, 유일한 생존자인 한 소녀를 포로로 붙잡아 부대로 데려온다. 소녀는 1949년 8월 13일 아침, '그'를 비롯한 군인 몇에게 강간 당한 뒤 살해 돼 사막에 묻힌다.


2부는 현재다. '나'는 소녀가 살해된 지 정확히 25년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임시 수도인 라말라 지역에 살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은 1부에서와 같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고(더 광범위해졌고), '나' 역시 자신에게 허용된 구역 외에는 이동의 자유가 없는 식민 지배의 현실에 살고 있다. 그 현실을 어떻게 써내려갈지 작가는 고민했던 것 같다. 건조한 묘사로 일관했던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나'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 긴장 등을 자세하게 묘사된다.

그래서다. 나는 '나'의 어딘가 부서진 듯한, 위태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알아버린다.' 그것은 뉴스에 등장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모습이었다. 가까스로 거처에 머물고(그마저도 번번이 파괴되되는), 힘들게 출퇴근을 하고, 동료/이웃들과 겨우 안부를 나누고, 동시에 수시로 터지는 폭발음에 익숙함을 느끼고, 반복되는 검문을 감당하고, '천장 없는 감옥'에서의 수인과 다름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 말이다. 그러니까 폭력과 착취에 장시간 노출되어온 피해자들의 삶을 선명하게 알아버린 것이다.

가령 이런 장면.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한다. 출근길에서 한 행인에게 그 지역에 통금이 발효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그것이 "특별할 게 없었기 때문에"(84-85쪽)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사무실의 정문 앞에는 두 명의 병사가 있다. 그들 중 한 명이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나'는 총알을 피하려 급히 뛰어 나무 뒤에 숨는다. 그런 뒤에도 '나'는 다른 길을 찾아 직장으로 간다. 자신의 책상에 앉아 일에 집중한다. 그러다 사무실의 옆 건물이 폭격을 당한다.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사무실 유리창 하나가 산산조각이 난다. 옆 건물에서 저항하던 청년 셋은 그렇게 살해되지만, '나'는 그 "사실보다도 폭격 때문에 자기 책상에 떨어진 먼지에 더 신경을"(88쪽) 쓴다.

나는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출근하는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 일상에 사는 사람이, 폭격과 검문이 일상적인 세상 속에서 "끔찍한 결과를 걱정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우리 집 커다란 창가의 탁자에 앉아 있는 일뿐"(87쪽)이 아니겠는가.


그런 '나'가 변한 것은 자신이 태어난 것과 꼭 같은 날짜에 이스라엘 군인에게 무참히 살해된 소녀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참담하게도)흔한 사건,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이 사소한 사건이 내가 아무리 잊으려고 노력해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91쪽)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 세상의 비참함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과거로 돌아가서 더 많은 비참함을 들춰낼 필요는 없다."(97쪽) 그렇지만 '나'는 결국 경계선을 모두 넘는다. "군사적 경계선, 지리적 경계선, 물리적 경계선, 심리적 경계선, 정신적 경계선"(105쪽) 모두를. 다음과 같은 한 가닥 생각을 붙든 채로 말이다.


"남들이 모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사소한 것들에 주목한다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건이나 일화 같은 것을 재현하는 것도 가능하다"(89쪽)


이제 '나'는 발각된다면 곧장 처벌을 받게될 게 뻔하지만 동료의 신분증을 빌리고, 동료 명의로 차를 렌트해서 자신에게 허락된 구역 바깥으로 나간다. 나가서, 소녀가 살해된 그 '사소한 일'을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지평선으로 뻗은 장벽을 마주하고, "전에 있던 팔레스타인인 마을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108쪽)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사건의 현장을 향해 간다.  

운전을 하는 '나'가 가지고 있는 것은 두 개의 지도다. 하나는 1948년까지의 팔레스타인을 보여주는 지도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지도인데 팔레스타인 지도에 수없이 보이는 마을(리프다, 알-카스탈, 에인 카렘, 알-말라, 알-주라, 아부 슈샤...)이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스라엘 지도를 보자 같은 지역에는 '캐나다 공원'이라는 이름의 큰 공원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과거를 찾아가는 '나'의 여정은 역설적이게도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모든 것의 부재를 지속적으로 내게 재확인시켜주"(110-111쪽)는, 참담한 현재를 확인하는 여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의 여정은 참혹한 현실의 거듭되는 확인이고, 그러한 '나'를 따라 읽는 것은 2024년을 사는 나의 시계에도 상처를 남기는 일이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오래 마음에 품게 된/될 장면은 바로 샤워 장면이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머뭇거린다. 결국 이스라엘 정착지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다. 깨끗하고 깔끔한 오두막에 들어서자 지독한 피로가 몰려온다. '나'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물을 튼다. 그러자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진다. "물줄기가 어찌나 풍부하고 강력한지 내가 있는 곳이 라말라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빨리 물을 잠그지 않으면 저수조에 있는 물을 다 써버릴 것이고, 그러면 이웃이 쓸 물이 하나도 안 남을 거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139쪽)

소설을 읽기 전에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 거주 지역에 물공급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된 공습으로 팔레스타인의 수도관이나 담수시설이 파손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물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소식을. 하지만 이것은 뉴스로 읽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실감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읽은 뒤로 물을 사용할 때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생각한다. 물을 통제하겠다는 발상을 떠올린 이스라엘의 지배자들을 생각한다. 혐오한다. 규탄한다.


그리고 독자가 확인하게 될 압도적인 결말.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며칠 전의 오후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뉴스에 뜬 한 줄 자막이 눈에 걸렸다.

[미국, 팔레스타인 피난민 100만 명 모인 라파에 대한 이스라엘 공격 승인]

많은 사람들이 현재 이스라엘의 학살은 미국의 적극적인 공모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엄청난 양의 무기를 지원하고 천문학적인 전쟁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윤경희 평론가는 "독자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저항과 연대는 독서다. 아다니아 쉬블리의 『사소한 일』(전승희 옮김, 강)을 같이 읽기를 청한다."고 썼다. 그래서 이렇게 읽고, 적어본다. 함께 읽기를 요청한다.


+) 함께 읽고 싶은 기사들

https://www.pado.kr/article/2024010420528886192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133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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