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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n 27. 2024

당신의 삶을 뒤흔들 수도 있는 어떤 망설임

하지은, 언제나 밤인 세계

책을 덮고 나서 여전히 잔상처럼 떠다니는 장면들을 갈무리할 시간을 요구하는 글들이 있다.

플롯을 쫓아가다 기어코 턱에 닿은 숨을 훅 들이켜며 그대로 멍하니 굳게 하는 글도 있듯이, 반대로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눈 안에 들어와 박혔던 가상의 공간들과 인물들을 천천히 내보내 주어야 하는 이야기를 만난 뒤엔 그 여운 탓에 오래도록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은 작가의 소설은 이것으로 두 권째지만, 그 두 권 모두가 그렇게 긴 그림자를 남겨두고 떠났다.


http://aladin.kr/p/G68pZ



「얼음나무 숲」에서의 천재의 휘광에 자신을 가둬버리고 오래도록 괴로워했던 고요 드 모르페,  「언제나 밤인 세계」에서는 마침내 그의 존재를 바닥부터 흔들어버린 바람이자 그의 모든 동기가 된 한 영혼에 사로잡힌 모리세이 칼마. 치열한 묘사와 한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파헤쳐 그려낸 문장들이, 그들의 행동을 기꺼운 이해의 영역으로 옮겨놓는다.


아마도 실제로 곁에서 보았다면 결코 납득할 수 없었을 누군가의 행위가, 그 동기가 태어난 시점으로부터 한 인물의 내면의 역사를 절절하게 드러내는 과정을 죽 따라왔다면 그 누구라도 간단하게 아 이거 ***한 **네, 따위의 말로 한 사람을 쉽사리 평가하는 말을 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명한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는 '그럴 수 있겠네'의 핍진성을 납득시킬 만큼 잘 만들어진 인물의 서사를 따라가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고, 나는 하지은 작가의 인물들이 그렇다고 생각했을 뿐이고(물론 그런 훌륭한 소설을 쓴 작가는 엄청나게 많다. 많은데, 장르소설의 특성상 순문학보다 인물들의 동기는 조금 더 자극적이고 강렬할 수 있고 그것이 책과 아주 친하다고 할 수 없는 독자층에는 훨씬 호소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각자의 욕망이 추동하는 일련의 목표지점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인물들을 바라볼 때의 조마조마함, 응원하고 싶어지는 마음. 아시죠?


"그 어리석은 밤의 끝에서 나는 돌처럼 굳어 가고 있네. 아니,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야. 말 그대로의 의미지. 어쩌면 이대로 마지막을 맞이한다 해도 그다지 아쉬움은 없을지도 몰라. 그러나 단 한순간의 망설임이, 어쩌면 이쪽과 다른 저편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궁금증이 내 걸음을 움직였다네." -124쪽


아주 작은 그 망설임으로 인해 모리세이 칼마는 권태로운 삶에 빛을 얻었고 존재의 당위를 얻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한 사람의 삶은 찰나의 결심과 한눈팔기로 인해 얼마나, 어디까지 요동치는가... 어디까지 상승할 수 있고, 얼마나 깊이 추락할 수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알 수 없다. 그러니 가 보는 것이다. 찰나의 망설임이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


한 아기는 죽은 채 태어날 운명이고 한 아기는 살아 태어날 운명이었다. 그러나 죽었어야 할 아기가 살 아기와 한 몸이 되는 것으로 그 생명을 나누어 가졌다. 오직 살기 위해, 태어나기 위해 그런 모습이 되는 걸 선택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한쪽도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형제를 위해 나누어 줬다는 사실이다. 아직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 없는 저 작은 것들이 말이다.

긴 유배의 삶, 기약 없는 헤맴 속에서 그가 무언가로부터 감동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희를 축복하고 싶구나."

그들은 자신의 축복을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저주로 여길 테지만 진심으로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고 싶었다.

"너희들의 삶이 끝없는 밤으로 이어지길."

모리세이는 그렇게 속삭이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의 가슴은 이상한 기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게 무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나쁘지 않았다. -149쪽


그럼에도 소년은 어렸고, 아직 세상의 진정한 비열함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순수하게 무언가를 믿을 줄 알았다. 그래서 가소로웠고 그래서 사랑스러웠다.

"곧 스러질 생명, 게다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면......"

모리세이는 이전까지 에녹과 연결 짓지 못했던 하나의 개념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소년은 아름다웠다. -152쪽


이런 에피파니의 찰나들이, 한 편의 소설 속에서 발견될 때마다 등줄기가 꼿꼿해지는 기분이 된다. 정말로 좋았던 이야기들에는 그런 계시와도 같은 순간을 만나는 인물들이 꼭 있더라. 벼락처럼 내려 꽂히는 깨달음의 순간.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 나?


그러나 개는 그의 손이 닿기 직전 고개를 슥 숙여서 피했다. 그러곤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 나무라듯 모리세이를 돌아보았다. 마치 이렇게 묻는 듯했다.

나는 지금 이 거리에 만족해. 왜 변화하려 하지?

2년간 거의 매일 산책을 함께 했어도 그와 개의 관계란 결국 그 정도였다. 손을 뻗었을 때 닿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처음으로 씁쓸하게 느껴졌다. -170쪽


"하지만 대공,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다소 슬프지 않겠습니까?"

(...)

"우리는 시간이라는 게 거의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지요. 그렇기에 살아간다는 것에도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작은 파고라 할지라도 하나의 긴 선으로 보면 결국 똑같으며, 작은 것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일일이 고통스러워하는 삶은 우습다고요. 그러나 저는 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리석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고 그에 실망하는 살고 싶습니다." -302쪽


저도요, 백작님. 저도 그렇게 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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