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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04. 2024

시를 쓰는 이의 마음

이제니, 새벽과 음악 | 김연덕, 액체 상태의 사랑

어려워서 대부분의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시라는 장르를 꾸준히 좋아해 왔다.

처음 시를 좋아하게 됐던 까닭이라면 역시 시를 좋아한다면 있어 보이니까, 라는 아주 단세포적인 이유였던 것 같고, 지금의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그때와는 조금 다르게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영속적인 것보다는 찰나에 불과한 어떤 아름다움을 붙잡아 보려는 애틋한 노력의 산물처럼 보이고 때로는 읽히기도 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라고 대답할 것 같다.


내가 이동진 작가의 '매일매일은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만큼이나 자주 인용하는 것이 김영하 작가의 말인데, 이동진 작가의 말만큼 간결해서 기억하기 쉬운 문장이 아니어서 워딩은 정확하지 않지만 뉘앙스는 대강 이러하다. 어떤 소설을 읽었을 때 (정확히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더라도, 정도의 전제가 붙어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었다는 (사실 이야기였는지도 가물가물해요, 하지만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의미였던 것은 기억합니다) 정도만 얻어가도 그걸로 족하지 않은가- 하는 것인데, 바로 그런 이유로 어떤 시들은 마음에, 귓전에 한참 머무르며 메아리 같은 것을 남기고 떠나기도 한다.


대만의 지식인 양자오는 말하기를,


시의 가장 다른 점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데에 있다. 시는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야기하면 바로 파괴되고 말 경험과 심정을 보존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는 건 때로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가장 우회적이면서도 유일한 길이다. -교양으로서의 시, 22쪽


라고 했다.


http://aladin.kr/p/MqRzm


반대로 시인이 마음속을 스친 어떤 진실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록하면, 실제 세계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조차 없을 듯한 그 아름다움을 우리도 분명히 알게 된다. 진실의 그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사라져서 결국 시인의 시에만 남고 다른 데서는 찾을 수 없다. 바꿔 말해서 시에 기록된 건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지나간 흔적이다. 기록된 것 자체는 아름다움이 사라진 것에 대한 선언이다. -교양으로서의 시, 5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들은 이해하고 싶어도 도무지 어려워서 이해할 수가 없어서 머리를 싸매게도 하는데, 그토록 여러 번 이해하기에 실패했음에도 결코 무릎 꿇고 싶지 않은 그런 묘한 고집불통에 가까운 승부욕이 내게는 있어서 편법처럼 이용하는 것이 시인의 산문집이다.


최근 읽었던 시인의 산문집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이제니 시인의 산문집이었다.


http://aladin.kr/p/gQFwH


어떤 음악은 눈물처럼 쏟아진다. 군더더기가 될 것이 뻔한 수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불과 몇 줄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처럼. 그러나 문자가 전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물성으로. 이 추상적인 물성에 대해, 언어화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늘 명확한 언어로 쓰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은 매번 실패로 귀결된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는 음악은 무엇입니까. 나는 내 마음속에서 배음으로 흐르는 음과 색을 언어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23쪽


이렇게 시인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글줄을 읽고 있으면 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낱말과 낱말을 연결해서, 그 사이와 사이에 어떤 아름다움이 지나가도록, 신중하게 쓰고 또 거듭 고치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당연하고, 그래서 결국 어떤 시를 써냈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느릅나무에 익숙한 눈만이 느릅나무의 부재를 본다는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도 겹쳐서 생각했다. To a person chained in a cave, the shadows on the wall are reality. 하나 허상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전적으로 온전히 허상일 것인가. 알고 있다고 믿어온 그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 그와 같은 무게로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을 믿고 받아들이고 나아간다는 것.  -95쪽


이 산문집이 품고 있는 글들이 하나같이 반짝반짝해서 시는 어려워서 싫어도 시인이 조금 덜 압축한 그들의 속내를 풀어놓은 글이라면 시를 질색하는 이들도 한 번쯤은 쳐다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http://aladin.kr/p/WPob9


삶은 관념이 아니고 삶은 문학적이거나 합리적인 문장들이 아니고, 긴긴 역사들의 총합이나 변형들만인 것도 도 아니고, 삶은 요제프 다비드가 방수 처리해 준 오틀리의 구두이며, 프로코피에프가 전화기를 통해 들은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제1번 연주회, 고통스러워하는 못들을 목격하는 반 고흐의 눈이기 때문이다. 삶은 일요일 오후에 도미노 형태로 말라 갔던 두 일본 신학자의 서적들, 서적들의 아름다운 운조형성과 단지 그 형태로만 설명되었을 때 책들이 스스로 드러내게 될 빈약함, 눈부신 자신 없음이기 때문에, -175쪽
할머니가 나에 관한 기억을 모두 잃었음에도 겨울볕 아래 함께 누운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알아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며, 곧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원초적인 것"이었듯이, 우리 둘다 그것에 저항할 수 없었듯이. -222쪽


시 한 편을 외울 필요도, 차분히 이해하려고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그저 후루룩 읽어내리며 문득 마음에 꽂히는 한 줄만을 담아가도 시인은 이해해 주지 않을지. 어디에서 마음이 멈추더냐고, 오히려 궁금해할 것 같은 건 그냥 나만의 생각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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