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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06. 2024

삶에 버무린 책들을 기억하며

강민선, 상호대차

도서관의 순기능 중 하나라면 역시 보통 때라면 만나기 힘든 책과 우연히 조우하게 되는 거겠지.


책이 저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요한 도서관에서 서가 사이를 돌아다닐 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21쪽


http://aladin.kr/p/1q1Up


라고 우치다 선생님도 말씀하셨다. 운이 좋아 신발 신고 나서서 2분만 걸으면 되는 거리에 도서관과 이웃해서 살고 있는 덕택에 참새방앗간마냥 하루에도 서너 번은 도서관에 책을 가지러 갔다가 갖다 놓으러 갔다가, 뺀질나게도 드나든다. 그리고 이 책은 아마도 때마침 ㄱ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갖고 계신 뫄뫄 작가님의 책을 찾던 와중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PC에서 청구기호를 적어와서 찾는 편이 빠르지만, 대략의 기호분류만 외우고 있다면 천천히 보물찾기 하듯 서가를 탐색하는 편이 훨씬 즐겁다. 여하간, ㄱ작가님의 책을 우리 도서관은 단 한 권도 보유하고 있지 않더라는 사실만 확인하고 상호대차나 신청해야겠군, 생각하며 슬쩍 813으로 이동하려던 찰나 하필 「상호대차」라는 제목을 달고 있던 책을 발견했으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http://aladin.kr/p/IyPtM


어, 그런데 슬쩍 후루룩 넘겨본 책장 사이사이로 언뜻 보이는 문장들이 마치 깔끔하게 잘 개킨 양말(나는 양말을 네모반듯하게 개켜 수납하는 데 일가견이 있어 뭔가 보기 좋고 반듯한 것을 보면 늘 모양새 좋은 양말 서랍을 떠올리는 괴이한 습벽이 있다...)을 보는 듯하여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흘긋 표지 날개를 살펴보니 문창과 출신에 사서로 일하셨다고 한다. 전에도 쓴 적 있지만, 도서관 이야기를 아주 좋아한다. 무인 대출기에 스캔하니 이미 도서대출 분량이 꽉 찼다고 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막내의 카드를 긋고 대출을 완료했다. 그 녀석이 내 카드로 수차례 무허가 대출 -_- 을 감행하고 심지어 연체까지 먹인 전적이 있기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여튼.

장마철에 읽기에 더없이 좋은 글이었다. 나는 에세이만큼 쓰는 사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르도 없지 않나 생각하는 쪽인데, 서평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한 책을 두고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읽었는지를 타인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굉장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마음에 들고 어디에서 공감하기 어려웠는지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 역시, 정말로 어지간히 큰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건조하게 쭉 이 책은 이런 책이고 이러저러한 내용을 어떤 식으로 다루고 있다, 라고만 이야기하는 글은 정보성 소개글로는 좋지만 리뷰로는 조금 아쉽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리뷰를 읽는 목적 자체가 같은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평가가 궁금해서인데...어떤 책을 읽고 너무 좋았거나 너무 싫었을 때에도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그건 유니콘을 보겠다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소원 같아서, 그냥 온라인에서 다른 독자들의 리뷰를 찾아 읽는 것으로 허기를 많이 달래고는 있지만.


근데 무슨 얘길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


Aㅏ.


장마철에 읽기 좋았다는 건, 질척이는 문장이 아니었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그렇다고 버석하고 메마른 글은 아니고, 얇게 저며 쨍쨍한 가을볕에 가볍게 말린 과일 같은 글이었다. 슬쩍 만져보면 건조한데 살짝 입에 넣고 굴려보면 금세 단맛이 배어 나오고 오래오래 여운이 감도는 맛. 스스로의 감정에 헐떡이며 쓴 문장(네 저요)과 한 번 걷어내고 다듬은 문장은 어마어마하게 다르다. 읽는 사람을 편하게 해 준다는 면에서도 그렇거니와 같은 마음에 잠깐이라도 손끝이라도 담가볼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면에서.


총 열 권의 책이 저자의 삶 곳곳에 갈무리된 모습으로 소개되는데, 그 책들 하나하나가 이렇게 삶의 한 대목과 운명처럼 만나 인연을 맺은 순간이 영화처럼 선명하고 그림자처럼 길게 남는다. 한 권으로도 좋은 책이었으며 훌륭한 책들을 잔뜩 소개하고 있어서 더 좋았다. 다른 분들도 만나볼 기회가 있으시길.


애초에 내가 염려했던 것은 2015년에 재밌게 읽은 소설이 삼 년이 지난 지금도 재밌을까 하는 거였다. 나의 경우 당시에 잘 읽은 책일수록 시간이 지난 뒤에는 애써 다시 펼쳐 보지 않으려 하는데, 시간의 흐름이 가져오는 어쩔 수 없는 차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때는 좋았고 지금은 별로가 되어버리는 게 싫다. -27쪽
이때 배수아 작가의 대답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내가 읽은 좋은 책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다면 나는 그 책의 첫 번째 문장을 읽어준다거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이야기해 줄 것 같다. 만약 그 작품이 상대를 건드릴 작품이라면 건드릴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할 작품이라면 온갖 설명을 다 해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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