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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미나인 May 28. 2021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Schilf

이 책을 읽고 2011년에 생각했던 것들

 




    남자는 살인을 택했다. 무지로 겹친 판단과 앎으로 요리된 이성이 뇌로부터 그를 얽는다. 그의 감성에 무자비한 손자국이 남는다. 그것은 시작과 끝을 알아볼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그것을 상황이라 명명했지만 실은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생명에 무게를 달도록 저 끝까지 몰아붙여진다. 혹은 단지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소년의 목숨과 한 남자의 삶으로 공식을 유도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없다와 있다라는 개념이다. 한 남자의 무가 한 소년의 유로 대체될 수 있다면 그것을 택한다. 그의 도덕원칙들이 단번에 붕괴한다. 거기에 터럭 같은 올올한 차가움이 자라난다. 가차 없는 실행만이 기다리고 있다. 모든 판단에는 오차가 없어 보인다. 그 우주는 돌아올 수 없는 인식의 길로 접어들었노라고 선언했다. 절망의 바닥에 종이처럼 오려붙여진 후 나타나는 반응이다. 그러나 더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은 마치 늘 그랬듯 오류가 되었고 이성으로 제압했던 모든 것이 가벼운 한숨에 부스러지듯 황폐해진다. 그래 이것들 다 우연이었다고? 비명이 폭발한다. 바둑판과도 같던 앞날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한 인간을 위한 지독스런 이해로 구성된 우주의 장章들이 펼쳐진다. 정언적 도덕을 벗어난 감정의 뭉치에서 그물거리며 구더기가 기어 나온다. 그것을 한때는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아이는 꺼지라고 말했고 형사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확정보다는 물리학이다. 형사가 물리교수와 그 자신을 위해 사건을 푼다. 관계 형성이란 많은 면에서 주관적이기 마련이다. 물리교수에 살해당한 다벨링을 위해 병원 동료들이 눈물 흘린다. 생명을 저울질한 것은 누구의 의지였을까. 경험이라는 변환기를 거쳐 형성되는 인식의 변덕과 깨질듯한 단호함 그 직후의 물러짐. 출렁이는 기준의 높낮이. 무엇이 더블싱크인가. 물리교수는 다만 회피하지 않는다. 그가 구성했던 우주가 울렁거린다. 대략은 그랬다. 오늘날 물질주의는 인식의 근원적 갈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장악했다. 문득 우리의 감각은 파동의 결과이며 우리의 인식이 가는 길은 불완전하다고 그것을 뿌리에서부터 믿을 필요는 없다고 그런 생각들을 한다. 객관적 현실이 한 관찰자를 위해 그에 포착되기 위해 구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결국 의식의 산물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르지. 라고 제바스티안이 중얼거린다.



   읽고 난 후의 공백을 뚫고 들어온 말의 마디는 이러했다. 견해의 문제. 그 유야무야한 인식의 흐름 속에서 나는 나의 허영심과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했다. 의식에 민감한 사람들은 같은 잔가지에 놓인 나뭇잎처럼 서로를 부빈다. 혼란스러워 한다. 그리고 때로 율리아와 같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경이로운 존재를 바라본다. 한 동영상 강의를 봤다. 정의에 관한 내용이었고 미국 대학의 것이었다.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위로 한참동안이나 허공이어서 스산한 바람이 불 것만 같은 공간이 보였고 맞은편의 가장 넓고 낮은 지면은 교수가 차지했다. 그는 마이크에 대고 몇 번이나 물었다. 마치 그곳에 그들이 존재하는 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아주 용기 있는 답변이었습니다. 또 다른 의견은 없나요? 그 때마다 누군가 응답했다. 그 의견들은 동영상으로 찍히기에 안전해 보였다가 다시 그 반대로 보였다가 한다. 어느 사람의 논리나 위기에 봉착한다. 도덕과 정의에 관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묘사할 수 없이 거대한 양으로 중첩된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기본 원리는 추구되어져 온 만큼이나 완결되지 못했다. 선과 악의 대립관계는 그렇게 구분되는 자체 너머로의 도덕적 유효성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 모서리는 그렇다 해도 소설 마지막에 부드럽게 바스러진다. 적막하고 요란한 부식. 의식의 기량을 펼칠 공간은 남겨둘 수 있다. 더블싱크는 인식된 걸까. 오스카의 오만한 내면은 독백으로 가득 찼고 그래서 그는 두 팔로 팔짱을 끼는 대신 제바스티안과 포옹할 수 있었다. 생각한다. 나는 두려움이 많고 유순한 말을 선택하는 편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유무를 의심 없이 확신하는 때로 덧없는 모양의 자존감. 그 허영심을 기억한다. 상황에 대한 여러 해석을 꺼내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어떤 판단에 무념히도 교수의 말처럼 용기 있어 보였다. 문득 두려움이란 위태롭게 얼어붙은 허영심이 뜨거운 물에 순식간에 사그라든 모양은 아닐지 생각했다. 모든 것은 그저 단지 형태가 변환된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교수가 아주 용기 있는 답변이었다고 말해주는 게 무척 고마웠다. 동시에 어렴풋 생각한다. 정의와 도덕은 출렁출렁 유효하다.    





   인식하는 방법을 공유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다. 초반에는 은유 안에서 허우적대었다. 뇌가 영사기를 돌릴 때까지 서서히 예열되었다. 동시에 내가 느끼는 흥분이 쭉 문과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 설렘이 익숙함의 반어라면 말이다. 검지를 이용해 표현했던 모든 것들에 놀라우리만치 이름이 있다. 그걸 쓰면 지면 위로 얼마나 효율적인 표현이 가능해 지는가 생각해 본다. 수많은 명사들에 숨결이 불어넣어졌다. 언젠가 경험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그 단어들로 메워져 갔다. 인식은 무를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생각이 행동이 된다. 생각은 반드시 행동을 요하지 않았지만 어떤 행동은 선험적인 생각을 반드시 필요로 했다. 그 개연성이 말한다. 그 행동이 그 생각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 그 개연성은 또한 인간의 현존과 자유의지에 관한 어처구니 없이 낮은 확률을 보완하기 위해 멀티버스를 끌어들인다. 시간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 그리고 우연이 거기에 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문득 내 모습과 그 시공간들을 떠올린다. 모습들이 얽혀 구분없는 시간들을 형성한다. 그건 단 한 장면으로 내 앞에 놓여있다. 마치 연대기적 구성이 아니라 나 자체이다. 평행우주의 비행기 안에서 장시간 노출된 카메라로 바라보는 무질서한 시간의 잡동사니들. 그건 아름다울 수도 있고 무자비할 수도 있다. 한 인간의 기반은 쉽사리 무너지는 그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느껴진다. 정보와 변환으로 이루어진 거품. 무엇이 처음과 끝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더블싱크일지도 모르지만. 라고 오스카가 말했다. 유물론적이기도 하지. 라고 제바스티안이 말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새가 탈출했다. 대략 그랬지. 흥미를 잃은 관찰자가 날개를 퍼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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