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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Dec 06. 2018

단절된, 그러나 묵묵히 이어지는 움직임

<파수꾼> 비평

이 영화는 ‘학원 폭력’이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하고 있다. <파수꾼>에 관한 남다은 비평가의 아이디어를 조금 빌려서 이 영화의 고유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장르적 쾌감으로 주제를 분출하는 것도, 주제에 관한 특정한 답을 제시하는 것도 아닌, 무엇을 위해 폭력을 벌이는지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파수꾼>은 그러한 움직임으로 전개되는 영화이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아들의 방에서 유품을 보는 장면에서 문득 이웃집에서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학교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 운동장을 한눈에 담을 정도로 멀리에서 아버지가 작게 비친다. 본격적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인트로 장면인 걸까? 학교에 입장하는 장면은 평소에 들었다면 무신경하게 들었을 이웃집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연출된다. 드라마틱한 장치는 없다. 그저 거대한 운동장 위를 걷고 있는 왜소한 개인이 보일 뿐이다. 그 순간 나는 평소에 들었던 피아노 소리의 연주자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리적으로 가깝지만 사실 가깝다고 말할 수 없는 관계, 공간적 거리와 반비례하는 심리적 거리. 음악은 그 아이러니한 거리가 보여주는 단절감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운동장 쇼트는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찾아 나서는 기묘한 여정이 아닌, 진실을 규명해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떠나는 가슴 벅차거나 혹은 긴장감 넘치는 여정도 아닌, 물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결코 그 공간을 흐르는 공기를 감각하지 않았던 어떤 단절된 세계로 들어가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여정으로 느껴졌던 것일 테다.


영화는 아버지가 아들의 자살과 관련된 의혹을 풀기 위한 요청에서 시작되어 동윤을 찾는 희준의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인 동윤은 (굳이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권력을 가진 기태의 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잔인한 말로 기태를 죽인 ‘가해자’라고 규정될 수 있다. 어쩌면 오해에서 일으켜졌을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뒤틀리게 만든 남성적 약육강식이라는 배경. 사실 영화는 단짝 친구의 갈등을 전면에 보여주지만, 그리고 그 갈등 속에서 느껴지는 권력 차, 폭력성 역시 드러내지만, 그것 이상으로 나는 그들을 둘러싼 배경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기태가 화해를 위해서 희준한테 다가갈 때, 초점에 잡히지 않는 다른 학우 무리들이 그들을 둘러싼다. 그리고 희준을 감싸는 동윤이 기태와 싸우는 장면에서도 초점 잡히지 않는 다른 학생들은 그저 구경꾼으로만 남는다. 아주 잠깐 기태를 따르는 학생이 단독으로 잡히는데, 그 잠깐의 장면에서 카메라에 잡힌 학생은 권력관계에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계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희준을 거침없이 때리고 자기 기분에 따라서 쉽게 행동하며 강압적으로 희준을 대할 수 있는 기태의 권력도 보기 힘들었지만, 그것보다도 초점 없는 주변 학생들의 실루엣, 그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이 무척이나 무서웠다.



기태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진 무리들. 그들은 기태를 따르며 기태의 기분에 맞추어 행동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들은 복합적인 기태의 감정은 무시한 채로 오직 ‘기태’라는 강자로서의 역할을 지탱하기 위해, 다시 말해 힘의 논리로 구성되고 있는 일진 문화를 지탱하기 위해 기태와 함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복합적 감정으로 격동하는 기태는 지워진다. 오직 그들의 시선으로 비치는 ‘기태’라는 껍데기, 이 학교의 짱만 남게 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기태의 아이들’이 아닌, ‘기태’의 아이들로 기태와 갈등을 일으키는 동윤을 자발적으로 폭행한다.


희준, 기태, 동윤의 관계는 엇갈린다. 사소한 사건에서 출발하여 복합적 감정을 머금은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그들 관계에서 희준과 동윤은 기태와 ‘기태’에게 상처를 입었고, 결국 기태에게 상처를 준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어머니의 부재로 외로움을 겪으며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했던 기태는, 학교 안에서 흐르고 있는 폭력적 일진 문화를 경유하며 뒤틀리게 되고, 또 뒤틀리게 된다. 결국 껍데기만 남은 기태가 동윤과의 화해를 위해 학교를 나설 때, 그러니까 더 이상 껍데기가 유효하지 않은 공간으로 나갈 때의 기태의 모습이 무척이나 왜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힘없는 그의 모습과 함께 복합적 감정을 암시하는 듯한 음악이 들려온다.


그리고 동윤으로부터 상처 받은 기태. 갑자기 흐르는 위층의 피아노 소리는 기태를 둘러싼 그들 사이의 감정에 관한 주변의 무심함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기태는 그 무심함을 듣는다. 그 순간 기태는 자신의 삶을 지탱시킨 소중한 친구들이 사라져 버렸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베란다에 서있는 기태의 뒷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응시할 수 있을까?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개인이 죽음의 문턱 위에 서있는 모습을 어떻게 응시할 수 있을까? 차마 응시할 수 없는 그 모습을 카메라는 일부러 감추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울고 있는 동윤이 부엌으로 나오자 기태를 본다. 마치 죽은 기태와의 추억을 동윤이 회상하는 것만 같다. 기태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비참해지더라도 동윤만 있으면 된다고 고백한다. 카메라는 그렇게 말하는 기태의 얼굴을 거울 속에서 담아낸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동윤의 집에 있는 거울이 총 두 번 나온다. 동윤을 찾은 희준이 동윤과 대화를 나눌 때. 그리고 자고 있는 희준을 두고 기태와 동윤이 대화를 나눌 때. (잘 보면 동윤과 기태와의 장면만 색감이 다르다.) 동윤의 얼굴은 캄캄하지만, 거울 속 희준과 기태의 얼굴은 선명하다. 희준과 기태 모두 동윤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자고 말하는 셈이다. 그 순간들 속에서 영화 제목의 의미는 뚜렷해진다. 파수꾼. 감독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어두운 성장담에서 그 제목을 가져왔다고 했지만, 또 ‘파수꾼’이라는 단어를 진실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로도 정의했다고 한다. 관계 속에서 인물들은 본래의 감정들과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촘촘하게 구성하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에 의해 구성되었을 언어와 몸짓으로 서로 겉돌게 되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거울 속 희준은 동윤에게 진실을 꺼내야 함을 호소하고, 거울 속 기태는 직접 자신의 진심을 동윤에게 꺼낸다.


그러나 동윤은 아버지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 장면에서 동윤의 얼굴은 반만 조명에 비치고 다른 쪽은 어둠에 잠겨져 있다. 숨기려는 마음과 드러내려는 용기가 충돌하는 것일까? 결국 그는 도망친다. 버려진 기찻길로.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그들이 향유했고 그들이 갈등했으며 한편으로는 권력으로 타인을 소외시키는 익숙하지만 낯선 그 공간으로 향한다. 거기에서 동윤은 기태를 불러내어 화해를 한다. 기태를 인정한다. 영화는 그들끼리의 화해 아닌 화해로 끝을 맺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너무 축소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아들을 잃고 진실을 찾아 헤맨 아버지의 서사가 갑작스럽게 중단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영화에서 어른들의 모습은 기태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선생님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주 가끔 어른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존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영화의 언저리에 머무른다. 이러한 부재는 십 대들에 관한 어른들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여기에서 그 무관심을 미학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파트이다. 아파트는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많은 수많은 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똑같이 생긴 다른 아파트 건물이다. 전망이 좋은 아파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소수의 전유물이며, 그 전망은 촉각적으로 체험된다기보다는 사각형의 공간에서 전시될 뿐이다. 마당은 주차장이 되었고, 수많은 세대가 밀집되어 있음에도 이웃 사이의 거리는 멀기만 하다.


마지막에 동윤이 도망치듯이 달리는 쇼트에서 갑자기 아파트 쇼트로 전환된다. 방금까지 역동했던 운동이 차가운 아스팔트라는 이미지로 정지된다. 이렇듯 <파수꾼>에서 맞닥뜨리는 갈등과 그 갈등으로 빚어지는 움직임은 어느 지점에서 아파트의 소음, 혹은 이미지와 함께 정지된다. 이웃집 피아노 소리와 함께 기태의 삶이 정지될 때, 동윤의 달리기는 차가운 아파트 이미지로 정지된다.


감독은 우리 사회가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그것을 규정하려고 하지만 그 안의 구체적인 결들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사회는 십 대들의 삶을 규정해왔지만 십 대들의 구체적 맥락들을 감각할 의지가 없다는 것. 물론 거칠게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영화라는 매체에서 볼 때 청소년 주체의 서사가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이다.


기억나는 영화가 하나 있다. 초등학생 문화 속 권력과 갈등을 그려낸 <우리들>이라는 영화다. 여기에서 어른들은 주변인에 불과하다. 어른들의 목소리는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소음으로 밀려나며, 카메라는 청소년의 시점인 낮은 각도에서 잡힌다. <파수꾼> 속 어른들도 진실을 찾고자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에 아예 포함될 수도 없다는 듯이 카메라 밖으로 밀려난다.


영화는 단순히 학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십 대의 어두운 성장기 속의 촘촘한 결들을 응시한다. 이 응시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된다. 영화 속 분위기는 그 움직임을 무력케 할 정도로 무심하지만, 영화는 그 무심함도 함께 보여주며 규정된 사실 이면의 진실을 향해 묵묵히 나아간다. 그 끝에서 나온 건 어떤 해답이 아니다. 공간의 경계에서의 진실을 고백하지 못하는 상처 받은 개인의 위로다. 이제 우리는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각자의 이야기로 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왜 감출 수밖에 없었을까? 그들을 경유한 위계와 폭력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그 시절에 무얼 욕망했고 무얼 은닉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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